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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개입 혐의 등으로 기소된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 재판은 지난 4년여 동안 ‘롤러코스터’를 탔다. 1심은 원 전 원장의 국정원법 위반은 유죄, 공직선거법 위반은 무죄라며 집행유예를 판결했는데 2심은 선거법 위반까지 유죄로 보고 징역 3년의 실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2015년 7월 대법원은 대법관 13명 전원일치로 이 사건의 핵심적 증거가 증거능력이 인정되지 않는다며 2심을 파기한다. 대법원은 원 전 원장이 무죄라고 명시하진 않았지만 법조계에선 사실상 그런 신호로 받아들여졌다. 그런데 2년을 끌다 지난달 30일 결론이 난 파기환송심은 대법원 뜻대로 핵심 증거의 증거능력은 부정하면서도 원 전 원장의 선거법 위반은 유죄로 판단해 2심보다 더 늘어난 징역 4년을 선고했다.

재판 결과가 정권 교체 때문이라는 이들도 있다. 박근혜 정권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면 다른 결론이 나왔을 것이라는 애기다. 이쯤되면 유명한 조폭 영화 <대부3>의 한 토막이 떠오른다. 마피아의 새 대부 빈센트는 가문의 적을 제거하려 보낸 암살자를 통해 이런 메시지를 전한다. “권력이 없는 자 사라지기 마련이다.” 그 세계나 이 세계나 마찬가지라고? 본질적 문제는 박근혜 정권의 정통성을 훼손하는 국정원의 대선 개입 유죄를 어떻게든 피하고 싶어 한 것으로 보이는 2년 전 대법원 판결이다.

퇴임을 며칠 앞두고 있는 양승태 대법원장은 지난 13일 법원의날 기념식에서 “최근 재판에 대한 과도한 비난이 재판 독립에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다”고 작심한 듯한 말을 했다. 하지만 이제는 판결도 국민의 감시와 비판의 대상이 돼야 한다는 것에 사회적 동의가 형성돼 있는 게 현실이다. 국민들의 상식과 여론이 헌법과 법률에 위배되지 않는 한에서 판결에 반영돼야 한다는 것이다. 제한적이긴 하지만 한국도 국민참여재판이 운영되는 것이 바로 이 이유에서다.

특히 사회의 큰 방향을 결정짓는 대법원 판결은 더욱 국민들의 다양한 의견 수렴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전제돼야 할 것은 대법관들의 정치적, 사회적 다양성이다. 그래서 미국 대법원은 대법관 9명이 보수와 진보가 오락가락하며 균형을 맞추고 있다. 하지만 한국 대법관 대부분은 명문대 출신으로 공부에만 매달려 사법시험에 합격, 판사로 임용돼 윗선의 눈 밖에 나지 않는 판결과 언행으로 고등법원 부장판사로 승진하고 법원장이 된 뒤 그 자리에 오른 비슷한 인생과 경륜을 가진 이들이다. 대법원이 천편일률적 사고를 가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원세훈 사건을 판결한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구성을 보자. 재판장인 양승태 대법원장(서울법대·법관 출신)과 민일영(주심, 서울법대·법관 출신)·이인복(서울법대·법관 출신)·이상훈(서울법대·법관 출신)·김용덕(서울법대·법관 출신)·박보영(한양대법대·법관 출신 변호사·여성)·고영한(서울법대·법관 출신)·김창석(고려대법대·법관 출신)·김신(서울법대·법관 출신)·김소영(서울법대·법관 출신·여성)·조희대(서울법대·법관 출신)·권순일(서울법대·법관 출신)·박상옥(서울법대·검사 출신) 대법관 등이다. 전체 13명 중 서울법대 출신이 11명이고 비법관 출신은 단 한 명, 여성은 2명에 불과했다. 정치적 성향으로 보면 진보로 분류돼 ‘독수리 5형제’로 불렸던 김영란·박시환·김지형·이홍훈·전수안 대법관이 퇴임한 자리가 이명박·박근혜 정부를 거치며 모두 보수 성향 인사들로 다시 채워졌다는 평가를 받던 때다.

대법관으로 머리 좋고 법조문, 판례 많이 알고, 체제 순응적인 이들만 필요하다면 알파고가 하면 된다. 한때 ‘천하제일검’으로 불렸던 이세돌도, 현 바둑 세계랭킹 1위 커제도 알파고 앞에서는 맥을 못 췄다. 알파고가 인간보다 지능도 높고 정석과 기보도 많이 입력돼 있겠지만 혼을 쏟아 짜낸 필살의 승부수를 날리는 인간의 고뇌가 느껴져야 진짜 바둑이다. 법관도 사람이 해야 한다. 헌법 103조에 규정된 것처럼 법관은 헌법과 법률뿐 아니라 ‘양심’에 따라서도 심판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뜨거운 심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법관이 기준으로 삼는 양심은 사회적 보편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법학자들의 일치된 의견이다. 따라서 이 양심은 시대에 따라 바뀔 수 있다. 사회의 인권의식이 높아지면 그에 맞춰 법관이 판단할 때 인권에 대한 기준도 높아져야 하는 것과 같다.

변화하는 사회적 가치, 분출하는 사회적 요구를 제대로 반영하는 다양한 양심을 가진 대법관들이 필요하고 그것이 바로 대법원이 바뀌어야 하는 이유다. 지금까지 국민들은 오직 대법원의 판결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해석만 해 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대법원을 변화시키는 일이다.

<김준기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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