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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1년간 책을 만들고 있다. 예전에 한문을 잘하시는 선생님으로부터 한문 공부는 10년쯤 하면 문리가 트이고 다시 10년을 더 하면 ‘속 문리’가 트인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때 한문이라는 건 참으로 어려운 것이구나 생각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속 문리라는 말이 좋았다. 이런 비유가 적당할지 모르겠는데 사람이 번개를 맞고 살아나면 번개의 길이 생긴다고 한다. 그래서 다시 번개를 맞아도 그 길을 따라 전기가 땅으로 빠져나간다. 그런 사람들이 ‘번개를 맞기 위한 벙개’를 하는 김영하의 소설이 있다. 속 문리라는 것은 그런 번개의 길 같은 것이 아닐까. 일단 그런 길이 생기면 어떤 어려운 한자와 만나도 그 길에 태워서 흘려보내다보면 해석과 조우하게 되는 그런 길.

내 안에 그런 길이 있느냐 질문을 던져보니, 돌멩이 하나 떨어져서 텅텅 튀는 소리만 되돌아온다. 그러던 어느 날 표지의뢰서를 작성하다 번개에 맞는 듯했다. 의뢰서엔 기본적으로 책 내용과 저자에 대해 쓰고 타이포 중심으로 가달라든지, 색감을 부드럽고 연하게 해달라든지 등 편집자가 원하는 방향을 쓴다. 그 외에 ‘예상 독자층’을 적는 항목이 있다. 그걸 쓸 때마다 나는 어려움을 겪는다. 어떤 때는 ‘40~60대 남성’이라고 쓰기도 하고, 어떨 땐 ‘대학 강사 이상’이라고 쓰기도 한다. 책의 주제에 따라, 난이도에 따라 막연하게 떠오르는 특정 연령층이나 집단을 적는 것이다.

책이란 것도 상품이기 때문에 좋아할 만한 층을 타기팅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과학적 조사와 분석에 따라 타깃 층을 도출해내고 그에 맞게 제목을 뽑고 디자인을 하는 일이 이상할 것은 없다. 문제는 조사와 분석이 늘 자의적이고 게으르다는 점이다. 그러니 타깃 층은 바다처럼 한없이 넓어진다. 우리나라에 ‘40~60대 남성’이 얼마나 될까? 아마 1000만명쯤 되지 않을까? 고작 몇 천 부 판매할 책을 1000만명 대상으로 타기팅한다는 것은 심각한 잘못이다. 알면서도 반복하는 잘못이다.

차라리 책을 만들 때 단 한 명의 독자를 상정하면 어떨까? 어느 날 표지의뢰서를 쓰면서 번개에 맞은 듯했다는 게 바로 이 대목이다. 한 명의 취향과 한 명의 욕구를 완벽하게 맞추는 책을 상상해본다. 그 사람의 성별을 선택하고, 연령대, 직업, 가치관, 취향 등등으로 좁혀나간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상상의 인물을 머릿속에 넣고 교정을 보기 시작한다. 문장을 다듬을 때, 단어를 정리해줄 때 일관성을 갖고 임한다. 이 사람은 스타카토식의 짧은 문장을 좋아할 거야, 나 나름으로 확신하고 거기에 맞춰서 속도감을 낸다. 양장본을 좋아해도 무거운 건 싫어할 경우 거기에 맞게 종이를 쓰고, 딱 끊어지는 제목보다 문장형의 제목을 선호한다면 거기에 맞게 여러 가지 문장을 뽑아본다. 의뢰서엔 이렇게 쓴다. “한 달에 해외출장을 3번 이상 다녀오고 블루스 음악을 좋아하는 다독형 펀드매니저.” 그렇게 만든 책은 항상 그 사람을 떠올리게 할 것이다. 아마 독자도 그런 세심한 설계와 배려를 느낄지 모른다. 책은 형식적으로 볼 때 저자보다는 편집자의 작품에 더 가깝다. 그럴 때 책은 만든 이를 닮게 된다. 사실 책을 만드는 많은 편집자가 단 한 명의 독자로 상정하는 이가 누구겠는가. 바로 자기 자신이다. 자신의 취향과 가치관을 만족시키는 게 편집자다.

어느 순간부터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내가 만족할 만한 책이 아니라 불특정 다수가 만족할 만한 책을 만들었다. 많이 팔 욕심 때문이다. 그 불특정 다수는 실체가 없고 숫자로만 존재한다. 즉 허상이다. 며칠 전 한 인터넷서점 MD는 강연에서 1000만명의 회원을 거느린 자사의 데이터베이스는 모집단이 너무 넓어서 활용하기가 난망하다고 발표했다. 바로 그것이다.

한 명의 독자를 타기팅한다는 건 일종의 제유법이다. 어떤 사물의 부분을 들어 그 사물의 전체를 비유하는 것인데 “빵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와 같은 표현이다. 한 명의 독자를 염두에 둔 책 만들기는 결코 협소하거나 외골수의 노선을 타는 게 아니다. 오히려 한 사람의 형상을 빚어내는 일에 가깝지 않을까? 손은 남자, 발은 여자, 배는 40대, 코는 유럽인과 같은 프랑켄슈타인이 아니라 책의 요소요소들이 유기적으로 통합된 책은 그 안에 담긴 메시지나 읽기감이나 그립감 등 모든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올가을에는 원고 교정을 많이 보려고 한다. 연초부터 외부 행사가 많아 부산스러웠는데 10월이 되니 이제 여유가 생긴다. 한 책에 한 명의 독자를 짝 지운다는 건 꽤 설레는 일이기도 하다. 물론 그동안 방치해둔 나 스스로도 한 명의 독자로 살려내서 책 만들기에 참여시킬 예정이다.

<강성민 | 글항아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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