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십수년 전 배우 정우성씨가 출연해 히트했던 텔레비전 광고시리즈가 있었다. 중화권의 스타 배우였던 장쯔이와 함께 출연했던 음료수 광고였는데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는 남자가 연인을 품에 안고 “우리 그냥 사랑하게 해주세요”라고 절규하는 장면이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지금까지도 노래 제목이나 패러디로 등장할 만큼 많은 이들의 뇌리에 박혀있을 정도다. 묘하게도 지난달 말 문재인 대통령의 유엔 기조연설은 이 유명한 광고가 생각나게 했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9월 19일 백화원 영빈관에서 정상회담을 마친 뒤 평양공동선언서를 펼쳐 보이고 있다. 평양사진 공동취재단 서성일 기자

문재인 대통령은 제73차 유엔총회에서 전 세계를 향해 한반도의 평화를 역설했다. 남북이 3차례 정상회담을 열어 한반도와 동북아의 평화안정에 기여하고, 북·미 정상회담 역시 묵은 적대관계 청산의 발판을 만들었다고 천명했다. 이어 ‘전쟁 없는 한반도’ 시대는 이미 시작했다며 “북한이 이제 핵을 포기하고 국제사회 일원으로서 책임과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협력해 줄 것을 간절히 요청한다”고 평화를 호소한 것이다. 1년 전 이맘때 같은 장소에서 한반도의 전쟁위기로 인해 평화의 전당이어야 마땅할 유엔에서 상대의 멸절을 언급하는 위협의 교환이 난무했지만, 이번에는 상대를 인정하는 유연함과 평화의 메시지가 교환되면서 유엔의 의미도 되살아났다.

6월12일 역사적 북·미 정상회담은 이후 실무협상에서 궤도를 이탈해버렸고, 70년 불신구조가 재작동하면서 교착에 빠졌었다. 지난 3월의 재현처럼 특사단의 재방북에 이어 3차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면서 죽어가던 한반도평화프로세스가 호흡을 이었다. 남북정상회담은 기대 이상의 성공을 만들어냈지만, 돌아보면 방북 이전의 우려는 매우 컸었다. 무엇보다 정상회담은 판문점선언과 비핵화라는 2가지 측면에서 확실한 진전을 강하게 요구받았다. 결과적으로 전자는 한반도 종전실현으로 전쟁 가능성을 완전히 종식할 담대하고 구체적인 실천에 합의함으로써 성취하였다. 북한에 말려들어 비핵화는 뒷전에 놓고 남한이 가진 재래식 무기체계의 우위를 포기했다는 일각의 주장은 근거가 없다. 오히려 북한이 핵을 개발한 이유였던 재래식 무기의 열세로 인한 존재론적 위협을 감소시켜줌으로써 핵을 포기할 유인을 더 높인 셈이다. 두 번째 진전인 비핵화에 대한 북한의 구체적 양보는 그 일각의 주장을 더욱 무색하게 만들었다. 동창리 시험장 폐기에 대해 미국의 비판자들이 그토록 요구하던 검증을 조건 없이 수용하였고, 더 나아가 북한 핵 개발의 핵심이자 상징인 영변 핵시설을 상응 조치의 조건부로 폐기하겠다는 구체적 약속까지 내놓았기 때문이다.

이제 공은 미국으로 넘어갔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미 오래전 공은 미국에 있었지만, 골대를 옮겨가면서 북한의 양보만을 압박했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하다. 종전선언과 북·미 연락사무소 설치까지 구두 합의했다가 국내 반발에 미적거렸던 미국 정부가 행동할 차례다. 센토사합의의 1항인 새로운 북·미관계와 2항인 평화체제 구축은 미국이, 3항인 비핵화와 4항인 유해송환은 북한의 이행사항인데, 북한만 이행하고 미국은 하지 않고 있다.

남북정상회담 직후 한·미 정상회담과 유엔 연설로 이어지면서 남북이 조성한 평화를 세계가 돕는 구도가 마련되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제 국제사회가 북한의 새로운 선택과 노력에 화답할 차례”라며 “북한이 항구적이고 공고한 평화의 길을 계속 갈 수 있도록 이끌어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남북한이 평화롭게 살겠다는데 굳이 왜 방해하는가라는 국제여론이 형성된 점이 고무적이다. 미국이 여차하면 평화의 방해자로 인식될 수 있다. 마침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자신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사랑에 빠졌다는 표현까지 했다. 트럼프 특유의 상대를 ‘가지고 노는(toying)’ 여지도 있어 보이지만, 문재인-김정은-트럼프가 한배를 탔다는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을 확인한 의미가 더 크다. 그가 말한 김정은의 “예술적인 편지”의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비핵화의 통 큰 양보라면 트럼프 역시 내부 강경파의 방해 공작을 과감하게 제압하고 평화프로세스를 함께 이루어가야 할 것이다.

자신은 북한에 아무것도 양보하지 않았다는 트럼프의 말은 지금까지는 옳았으나 이후로 바뀌어야 할 것이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이 오는 7일 올 들어 네 번째로 평양을 방문해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만난다. 이 자리에서 북한 영변 핵 시설 사찰·검증·폐기와 종전선언, 2차 북·미 정상회담 일정 등을 놓고 담판을 벌일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우리 그냥 평화하게 해주기를 간곡히 요청한다.

<김준형 한동대 교수·국제정치>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