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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고 아프고 씁쓸하다.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 문체부의 블랙리스트 비위행위자 ‘징계 0명’ 입장에 현장 문화예술인들이 다시 분노하고 있다. 지난 6월 말 ‘블랙리스트 진상규명 및 제도개선위원회’는 구체적인 사실을 적시해 문체부와 산하 공기관 131명에 대한 ‘책임규명 권고안’을 제출한 바 있다. 진상조사위는 문재인 대통령 국정과제 1호인 적폐청산 1번 과제로 약속되어 국가와 시민사회가 공동으로 꾸린 초헌법적 기구였다. 블랙리스트 사건은 1만여명에 이르는 문화예술인을 10여년에 걸쳐 일상적으로 사찰·검열하고, 사찰을 넘어 현재까지만 3000여건의 구체적인 배제 사건 등이 확인된 전대미문의 국가범죄다. 두 전직 대통령과 비서실장, 정무실장, 전직 문체부 장관 두 명 등이 우선 구속된 초대형 게이트다. 청와대, 국정원, 문체부와 수십개 공공기관들이 긴밀히 공조해 조직적으로 헌법에 보장된 사상표현의 자유, 양심의 자유, 언론출판의 자유 등을 일상적으로 짓밟은 현대판 분서갱유다. 잘 보이지 않는 작동 및 실행 방법 탓에 저강도인 듯하지만 국가 주요 기관들이 ‘학살배제자’ 명단을 작성하고 은밀하게 실행해 온 무시무시한 홀로코스트였다. 문화예술인들만 피해자가 아니다. 모든 주권자들의 사상과 양심, 표현의 자유와 문화적 향유의 권리가 짓밟혔다.

애초 이런 사건의 방대함과 중함에 따라 대통령 직속위원회로 법령에 기초한 진상조사위 설치와 국회의 국정조사도 요구해 왔다. 대선 이후 적폐청산의 시급함 등을 들어 장관 자문기구 형식으로 출범했지만, 그 권한과 역할에 부족함이 없게 하겠다는 대통령과 정부, 장관의 약속을 믿고 출범했다. 그러나 그 권한과 역할에 대한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진상조사위는 출범 이후 끊임없이 ‘장관 자문기구’일 뿐이라는 역할과 권한에 대한 축소와 흔들기와 방해, 외면과 공격에 직면했다. 종종 자유한국당 등의 정치적 공세가 핑계였고, 각종 법률 조항이 모든 활동을 옥죄는 수단이 되었다. 심지어 2018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위 활동 예산은 정부·여당도 적극적으로 방어하지 않아 국회에서 전면 삭감되었다. 간신히 24명의 조사관이 전원 채용된 것이 11월 중순이었는데 예산 전액 삭감을 이유로 12월까지만 활동하고 문 닫으라는 협박과 엄포가 날이 섰었다. 그나마 최소한의 진상규명을 이루어 온 것은 조사위에 참여한 민간 문화예술계, 시민사회와 소수 조사관들의 헌신적인 노력 덕택이었다.

그런데 문체부로 공이 넘어가고 돌아온 첫 대답은 진상규명과 재발방지, 문화예술 생태계 전면 쇄신으로 가는 첫 관문이자 가장 중요한 과제인 ‘책임규명 권고안’에 대한 전면 부정과 배신과 기만과 조롱과 모욕이다. ‘수사의뢰 4명과 주의 조치 10명.’ 주의는 일상 서류관리만 잘못해도 내려지는 처분으로 징계가 아니다. 그 외 숫자에 포함한 인원은 박근혜 정부하 감사원에서 진행한 감사 결과 처분이다. 더더욱 영화진흥위원회,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등 주요 문체부 소속 공기관들은 ‘문체부 아님’이라는 딱지를 붙여 자신들의 역할을 부정했다. 사건의 특성상 진상조사위는 독립성, 책임성과 공정성 등을 고려해 도종환 장관이 공동위원장을 맡고, 문체부 핵심인 기조실장과 문예실장, 감사관이 위원으로 참여해 책임규명안의 모든 심의 의결 과정에 함께했다. 이를 다시 행위 당사자 집단 주도하의 ‘내부 검열과 마사지’ 과정을 거쳐 형해화시킨 것 자체가 블랙리스트 진상규명의 사회적, 역사적, 공적 과정에 대한 전면 부정과 왜곡에 다름 아니다. 촛불혁명 과정에서 쿠데타 계획을 수립한 기무사는 현저히 부족하지만 조직의 3분의 1이 떨어지고, 이름과 성격, 내용에 대한 부분적인 쇄신이나마 이루어졌다. 10여년 동안 문화예술인과 국민들을 대상으로 일상적 쿠데타를 실행해 온 문체부에 대한 책임은 더 엄하게 물어야 한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131명에 대한 책임규명안은 재고되어야 한다. 그것이 아프지만 다시는 이런 전대미문의 국가범죄가 없게 하는 역사적 경계표지석이 될 것이다. 진상조사위는 그 권한과 역할, 조사 기간의 미비로 이명박근혜 시절 청와대와 국정원 등에 대한 조사와 자료에 접근하기 힘들었다. 일명 ‘캐비닛 문건’도 볼 수 없었고, 검찰과 법원에서 진행 중인 블랙리스트 핵심 자료 공조도 힘들었다. 모든 조사가 이제 막 시작인 상태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문재인 대통령과 장관, 문체부가 지금 내야 하는 입장은 이런 불충분한 과정에 대한 구체적인 사회적 보고, 진지한 반성과 사과, 이후 미진한 부분을 채워 갈 좀 더 진지하고 성실한 이행 과정에 대한 계획이지, 이런 식의 왜곡과 폄훼, 불쾌한 블랙코미디가 아니다.

<송경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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