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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12월10일 ‘세계인권의 날’에 서울시가 서울시민인권헌장을 선포할 예정이다. 하지만 “서울 시민이 언제, 어디서나, 누구나 누려야 할 기본적인 인권을 직접 만든다”는 헌장 제정 취지가 성소수자 혐오 앞에서 무색해질 위기에 있다.

150명의 시민위원들이 마련한 인권헌장 초안은 9월, 10월 두 차례 권역별 토론회를 통해 일반 시민에게도 공개됐다. 이 토론회에 일부 개신교, 보수 단체 회원이 대거 참석했는데 인권헌장의 차별금지 사유 중 ‘성적지향’과 ‘성별정체성’을 지우기 위해서였다. 이들은 에이즈 감염에 대한 편견과 공포를 조장하면서 성소수자를 혐오할 권리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인권헌장이 없는 게 낫다는 식의 발언들을 쏟아냈다.

성소수자 인권보호를 논하는 자리면 어김없이 재현되는 이런 난동은 성소수자 인권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더 필요하다는 변명거리를 제공한다. 실제로 혐오세력들은 차별금지법을 발의한 국회의원들을 ‘표’ 앞에 무릎 꿇리곤 했다. 지방자치단체들은 이들의 눈치를 보느라 성소수자가 캠페인을 열 장소조차 승인하지 않고 있다. 서울시도 이번 인권헌장 제정과정에서 방관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 성소수자는 더욱 존재를 드러낼 수 없으며 ‘인권을 누리는’ 시민으로 인식될 수 없다. 다른 시민들이 성소수자 차별을 제대로 이해할 길도 멀어지고 만다.

20일 서울시청 서소문별관 후생동 강당에서 동성애 반대단체 회원들이 피켓을 들고 서울시민 인권헌장 공청회를 저지하고 있다. 이 때문에 공청회가 무산되기에 이르렀다. (출처 : 경향DB)


서울시가 성소수자를 인권헌장에 표현하고 차별로부터 보호한다고 약속하면 ‘성소수자도 시민’이라는 선언적 힘을 가질 것이다. 인권헌장이 법적 강제력을 갖지는 않지만 차별의 대상들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역할은 할 수 있다. 이번 인권헌장에서 성소수자 차별금지를 배제한 채 ‘누구나’ ‘모두’와 같은 추상적인 표현으로 뭉뚱그린다면 결국 성소수자를 차별받는 대상으로 떠올리지 못하게 될 것이다.

지난해 세계인권의 날에는 서울 성북구에서 ‘성소수자가 차별과 배제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한다’는 내용이 담긴 주민인권선언문을 발표했다. 2012년 제정된 ‘서울시 어린이·청소년인권조례’에는 성적지향·성별정체성을 이유로 차별받지 않을 권리가 명시됐다. 그리고 13년 전 제정된 국가인권위원회법의 19개 차별금지 사유에도 성적지향이 포함되어 있다. 서울시민인권헌장이 이보다도 뒤처진다면 서울시의 부끄러운 역사로 기억될 것이다.

서울시는 이제부터라도 혐오 표현이 괴롭힘이자 인권침해라는 분명한 태도와 입장을 갖고 인권헌장이 본래의 취지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것이다. 역사적으로 소외받는 집단이 존재를 드러내고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 싸울 때마다 혐오가 등장했다. 성소수자 혐오는 여성, 장애인을 비롯한 다른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중첩되며 최근 세월호 희생자와 유가족에 대한 모욕적 발언들과도 관련이 깊다. 성소수자를 혐오할 권리가 용인되는 사회는 다른 누구에게도 안전하지 않은 사회임을 인식해야 한다.


송정윤 | 무지개행동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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