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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공자가 제자들에게 각자의 포부를 편하게 말해 보라고 했다. 여러 제자들이 자기 생각을 말하는 내내 옆에서 비파만 퉁기던 증점이 마지못해 말했다. “늦봄 무렵에 봄옷이 마련되면 어른 대여섯, 아이 예닐곱과 함께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 쐬다가 노래를 흥얼거리며 돌아오겠습니다.” 저마다 정치적 역할을 감당하겠다는 포부를 밝히는 자리에서 멋쩍게 밝힌 다소 뜬금없는 소망에 공자는 크게 감탄하며, 자신도 함께하고 싶다고 하였다. 세상을 구제하려 노심초사 애쓰던 공자가 왜 이렇게 한가로운 이야기에 깊이 공감했을까? 진정한 정치란 모든 존재가 자기 자리에서 아무런 얽매임 없이 삶을 누릴 수 있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거기에 공자가 그린 아름다움이 있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여말선초의 문인 이행은 소를 타는 즐거움으로 이런 자유로움을 누렸다. 그는 달 밝은 밤이면 술 한 병 옆에 차고 소 등에 걸터앉아 느릿느릿 울진의 산수를 거닐었다. 소보다는 말이 빠르지만 모든 것은 천천히 보아야 그 진가를 볼 수 있는 법. 그가 소를 타는 이유는 바람 쐬고 휘파람 불며 밝은 달빛에 비친 아름다운 자연을 찬찬히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정신없이 바삐 사는 현대인들에게 ‘느림’을 권유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언제부턴가 올레길, 느림보길 등이 곳곳에 생겼고, 자신의 고장을 슬로시티로 지정하여 사람들의 발길을 머물게 하려는 지방자치단체도 늘고 있다.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말하는 어떤 이들은 로봇세를 신설하여 많은 이들에게 여유로운 시간을 되돌려줄 수 있다는 장밋빛 미래를 제안하기도 한다. 이에 동의하든 그렇지 않든, 참 힘들게 달려온 우리들에게 가쁜 숨 고르고 찬찬히 거닐어 보는 시간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속도를 줄이거나 잠시 멈춰 서는 일은 그 자체로 소중하다. 그러나 그저 자신을 그런 환경에 잠시 가져다 놓았다 돌려놓는 데에 그친다면, ‘느림’을 콘셉트로 만든 또 하나의 상품을 소비하는 데 불과할 수도 있다. 이런저런 일들에 얽매이지 않고 작은 가치들을 따뜻하게 돌아볼 수 있는 넉넉한 마음, 그리고 가만히 그 자리에 늘 있어온 아름다움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는 밝은 눈이 필요하다. 그런 시선을 가지기 위해 소를 타고 다닐 수 없다면, 느릿느릿 인문고전을 읽는 즐거움을 맛볼 일이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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