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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영. 우리 곁 어디에나 있는 흔한 이름이 2018년 지금 한국 여성을 대표하는 위상을 얻었다. 2016년 출간된 조남주 작가의 <82년생 김지영> 덕분이다. <82년생 김지영>은 2년 만에 100만부 판매를 돌파했다. 2007년 김훈의 <칼의 노래>(2001), 2009년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2008) 이후 9년 만이다. 가슴을 뜨겁게 하는 이순신 장군, 눈시울을 붉히게 하는 엄마가 아닌 평범한 여성의 이야기, 그것도 페미니즘에 대한 백래시가 상당한 한국에서 그야말로 기적 같은 일이다. 이런 기적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페미니즘 책이 눈에 띄게 팔리기 시작한 것은 2016년이다. 출판계도 깜짝 놀랄 정도의 판매량은 20대를 위시한 여성들이 주도했다. 한국 사회의 여성혐오를 온라인에 국한된 것으로 애써 부정하던 여성들은 강남역 여성 살인 사건을 통해 ‘말이 칼이 되는 순간’을 목도했다. 범인은 남녀공용 화장실에 숨어서 여섯 명의 남성을 그냥 보내고, 일곱 번째이자 첫 번째로 들어온 여성을 죽였다. 게다가 범인은 “여자들이 나를 무시해서 그랬다”고 밝혔다. 명확한 증거와 자백에도 불구하고 경찰은 조현병 환자가 저지른 ‘묻지마 살인’으로 규정하여 여성혐오 사건임을 부정했다. 자발적으로 강남역에 모인 여성들은 “살女주세요” “살아男았다”라고 쓴 포스트잇을 붙이며 슬픔과 분노를 표출했다.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 매대에 놓인 <82년생 김지영>. 이 책은 2008년 출간된 <엄마를 부탁해> 이후 첫 밀리언셀러 소설이다. 김창길기자 cut@kyunghyang.com

강남역 사건을 계기로 여성들은 일상에서 반복적으로 경험하는 차별을 해석할 언어를 갖기 위해 페미니즘 책을 찾기 시작했고, 이때 <82년생 김지영>이 나왔다. 82년생뿐 아니라 세대를 초월해 여성이라면 누구나 겪는 경험을 담은 이 책은 ‘나를 이해해주고 설명해주는 내 이야기’였다. 여성들은 김지영에 깊이 공감했지만, 김지영과는 달랐다. 김지영은 고립돼 목소리를 잃었지만, 여성들은 적극적으로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말했고, 소통하고, 연대하고, 실천했다. 또한 주위의 남성들에게 자신의 ‘자서전’ 같은 이 책을 선물했다. 강남역 여성 살인 사건으로 여성혐오의 심각성을 비로소 인지한 남성들은 책을 통해 일상화된 여성혐오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lt;82년생 김지영&gt;의 대중성은 자신을 설명하고 주위의 남성들과 소통하려는 여성들에 의해 지지받고 확산됐다.

이렇게 탄생한 수많은 김지영들은 한국 사회에 젠더 문제를 이슈화시키고 견인했다. 강남역 여성 살인 사건 이후 자신들이 경험한 성폭력, 성차별을 지속적으로 공론화해 올해 미투 운동의 기반을 닦았다. 미투 운동을 계기로 다양한 젠더폭력으로 의제를 확대해 디지털성범죄, 데이트폭력 등 지금까지 주목받지 못했지만 심각한 범죄들을 수면 위로 드러냈다. 페미니즘 교육 초·중·고 의무화와 낙태죄 폐지 청원을 올려 정부의 답변을 받아냈고, 혜화역에 수차례 수만명이 모여 불법촬영 편파수사를 규탄했다. 또한 독박육아, OECD 국가 중 부동의 1위인 성별 임금격차 등 노동 이슈를 제기해 아이돌봄지원법, 남녀고용평등법 개정안을 비롯한 ‘김지영법’이 발의됐다.

페미니즘이 대중화, 세력화되는 동안 줄곧 여성들의 곁에 있었던 <82년생 김지영>은 페미니즘의 대명사가 되었다. 따라서 페미니즘에 대한 백래시도 이 책에 집중되고 있다. 책에 대한 폄하, 여성들의 보편적 경험이 아닌 과장이라는 반응, 책을 언급하거나 영화에 출연하는 여성연예인들에 대한 무차별 공격 등이다. 하지만 이러한 백래시로 페미니즘의 대중화, 세력화를 막기는 버거워 보인다. 책이 논란이 될 때마다 판매량은 급증했다.

<82년생 김지영> 100만부 판매는 폭력과 차별에 침묵하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려는 ‘용기’, 가부장적인 한국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도전’, 여성혐오에 방관하거나 공모했던 자신에 대한 ‘성찰’, 세력화되는 페미니즘에 대한 백래시까지 다양한 씨실과 날실이 엮인 결과물이다. 이 씨실과 날실은 앞으로도 끊임없이 교차되어 한국 사회의 성차별을 공론화하고 논쟁을 만들고 결국 이길 것이다. 김지영들이 아래로부터 성평등 민주주의를 실현시키고 있다.

<김고연주 | 여성학자·서울시 젠더자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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