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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로의존성이란 개념이 있다. 요컨대, 익숙한 것에 대한 집착이다. 일단 어떤 경로가 정해져서 익숙해지고 나면 나중에 틀리거나 비효율적이라는 사실이 확인돼도 벗어나지 못하는 경향성을 말한다. 다양한 분야에서 나타나는데, 물리학에서 말하는 관성의 법칙이 사회과학에 응용된 것이라 하겠다.


과거 반독재 투쟁 시절, 기본 균열은 민주 대 반민주였다. 즉 민주에 대한 찬반의 대립구도였다. 사물이나 현상을 찬반으로 보는 것은 옳고 그름의 시비로 구분하는 것이다. 일종의 당위적, 윤리적 관점이다. 민주화가 이뤄진 후 민주를 둘러싼 대립은 사라졌지만 찬반의 사고방식은 아직도 남아 있다. 특히 민주당에 강고하게 뿌리 내리고 있다.


찬반 사고는 두 가지 문제를 낳는다. 하나는, 어떤 문제든 찬성과 반대의 이분법적 차이로 이해하고자 하는 습성이다. 지난 대선을 예로 들면,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나 민주당 문재인 후보나 모두 복지, 경제민주화를 주장했다. 당시 민주당은 새누리당과 박 후보의 그것은 가짜이고, 자신들의 방안이 진짜라는 식으로 차별화를 시도했다. 진짜와 가짜, 즉 진위는 찬반이나 시비의 다른 표현이다.


지난 2010년 지방선거에서부터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까지 새누리당은 무상급식에 반대했고, 민주당은 찬성했다. 무상급식을 두고 분명한 찬반구도가 형성되자 유권자들이 쉽게 양당의 차이를 이해했다. 이 찬반구도는 서울시장의 사퇴와 연이은 보궐선거에서의 패배를 경험한 새누리당과 박 후보가 무상급식을 받아들이면서 사라졌다. 누가 더 잘할 것이냐 하는 우열구도로 대체됐다.


우열구도에서는 포지션보다 콘텐츠를 둘러싼 실력 경쟁이 중요하다. 인물, 신뢰, 리더십이 관건이다. 대표성이나 상징성을 갖춘 인물, 후보 등 지도자의 신뢰성과 리더십에 따라 누가 더 나은지 판가름된다는 얘기다. 경제민주화 이슈의 경우, 지난 대선에서 새누리당과 박 후보는 김종인이란 인물과 박 후보 본인의 리더십으로 승부했다. 반면에 민주당은 진짜 대 가짜라는 주관적 평가만 강요할 뿐 쉽고 간명한 그림이 없었다. 결과는 어땠을까? 당시 여론조사에 의하면 유권자들은 박 후보가 경제민주화를 더 잘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민주당의 진위 프레임이 먹히지 않은 셈이다. 민주당은 무상급식처럼 익숙한 찬반구도에서는 잘하나, 우열구도에서는 딱 숙맥이다.


(경향DB)


다른 하나의 문제는, 찬성과 반대가 분명한 정치·도덕적 이슈에만 매달리는 경향이다. 민주당이 지난 총선에서 민간인 불법사찰 이슈, 대선에서 정수장학회 등 과거사 이슈에 몰입한 것이 좋은 예다. 누가 보통사람의 고단한 삶을 풀어줄 더 나은 해법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데 민주당은 매우 둔하다. 사실 그들의 의지는 충만하고 열정은 넘쳐 보인다. 그런데 자신들의 해법이 왜 나은지를 보여주는 데에는 영 미숙하다. 2012년 민주당이 총·대선에서 패배한 것도 결국 새누리당과 박근혜 후보가 찬반구도를 허용하지 않고 우열구도를 조성하자 우왕좌왕하다 결국 경로의존성에 따라 찬반이슈에 매달렸기 때문이다.


물론 정치·도덕적 이슈도 중요하다. 부정부패나 권력의 오·남용, 불통 따위의 문제들은 야당이라면 의당 집요하게 파고들고, 가차 없이 비판해야 한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안 된다. 지금은 먹고살기 힘든 때다.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민생 문제를 의제화하고, 더 나은 해법을 제시해야 한다. 따라서 민주당은 찬반구도에 대한 경로의존성을 끊고 우열구도에 익숙해져야 한다. 이제 주장보다 실력이 관건이다.


정치·도덕적 이슈는 인화성이 강하나 지속성이 떨어진다. 반면 사회경제적 이슈는 쉽게 쟁점화하기 어렵지만 일단 형성되고 나면 효과가 크고 길다. 뉴딜 시기의 미국 민주당이나 유럽 사민당이 더불어 사는 사회를 건설할 수 있었던 것도 사회경제적 쟁점을 둘러싼 전선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민주당이 갈 길은 이 길이다. 특히 일시적 승리가 아니라 안정적 집권을 원한다면 다른 길은 없다.



이철희 | 두문정치전략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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