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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13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살을 에는 듯한 강추위에도, 추적추적 겨울비가 내릴 때도, 바람이 세찬 날에도 시민들은 어김없이 광화문광장에 모였다. 지난 몇 개월간 차가운 아스팔트 맨땅에 앉아 몇 시간을 견뎌도 좋을 ‘적당한 날’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지난해 10월29일 1차 촛불집회로 시작해 ‘대통령 파면’을 이끈 후 다시 모인 지난 11일. 광장은 에너지로 가득했고 분위기도 사뭇 달랐다. “오늘 하루만은 기쁨을 누리자.” “우리가 승리했다, 촛불이 이겼다.” 축제였다. 이들은 역사의 주인이면서 증인이었다.

그동안 광장을 지키며 이날을 만든 사람들의 마음에는 무엇이 담겨 있을까. 궁금했다. 경기 성남시 분당에서 온 김진희씨(42)는 온 가족이 함께했다. “집에서 헌재 선고를 듣는데 초반에는 탄핵이 기각되는 게 아닌가 해서 조마조마했어요. ‘파면’이라고 하는 순간 가슴이 벅차기까지 하더라고요. 오늘 7살 딸, 11살 아들, 남편과 함께 나왔어요. 우리 아이들이 노력한 만큼 보람과 대가를 얻고 성공할 기회가 있는 나라가 됐으면 합니다.”

LED 촛불봉을 팔고 있는 노점상 이모씨(39) 역시 촛불광장의 증인이다. 그는 빙그레 미소를 머금고 시민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지난해 1차 촛불집회부터 이날까지 빠짐없이 광장에 있었다. 그의 가판대엔 노랑, 빨강, 초록, 파랑, 분홍 빛깔의 촛불과 앙증맞은 촛불 머리핀이 놓여 있었다. 경기 남양주시에서 공구점을 하는 그는 행여 광장에 나온 아이들이 부모를 잃을까봐 이름표와 야광팔찌를 따로 제작해 그동안 무료로 나눠줬다.

“이제는 광장에서 만나는 시민들이 친구처럼 느껴져요. 익숙한 얼굴도 많아 인사를 나누기도 하고요. ‘고생한다’며 거스름돈을 안 받는 분들도 있어요. 분홍 촛불은 어린이들이 좋아해서, 특히 노란 촛불은 세월호를 잊지 말자는 뜻에서, 초록 촛불은 지지하는 정당색이어서 만들었어요. 서민들이 살기가 참 힘들잖아요. 새 대통령은 불법이 없고 희망을 꿈꿀 수 있는 나라가 되도록 해주기 바랍니다.”

이날 촛불행진은 박근혜 전 대통령이 아직 머물고 있는 청와대와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 공관이 있는 삼청동으로 이어졌다. 청와대로 향하는 길에 만난 한 여고생은 “집이 없는 국민들이 얼마나 많고, 잠자리 없는 노숙자도 있는데 왜 방(청와대)을 빼지 않느냐. 정말 끝까지 실망스럽다”고 했다. 이번 촛불을 통해 강력하게 제기된 ‘만 18세 선거권’ 문제 등 청소년은 적극적인 촛불 참여로 그들 역시 정치·사회의 주체임을 증명했다. 생극중학교 3학년 윤지수양은 충북 음성에서 올라와 촛불집회에 몇차례 참여했다. “이런 집회가 필요 없는 나라가 됐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이곳에 와서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많은 것을 배우고 생각하게 됐어요. 민주주의와 헌법의 가치에 대해서도요. 진로에 고민이 많고 무엇을 하겠다는 계획이 아직 확실하지는 않지만요. 이렇게 뭔가 해낼 수 있겠다는 기분이 들어 좋아요.”

어른들의 손을 잡고 나온 초등학생들도 의젓한 모습이었다. 5·6학년으로 보이는 아이들에게 새 대통령에게 무엇을 바라느냐고 물었다. ‘세월호 미수습자 인양’ 손팻말을 들고 있던 아이는 “세월호에서 나오지 못한 형, 누나들이 빨리 가족들과 만나게 해야죠”라고 말했다. 다른 아이는 “어른과 아이가 평등하고 외국인 노동자들이 차별받지 않는 나라, 서로 싸우지 않는 평화로운 나라가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간 광장은 스스로 발전하며 변화했고 모인 이들도 저마다 성장했으리라. 힙합에서부터 트로트, 판소리까지 세대와 취향을 아우른 노래들로 기운을 북돋았고, ‘탄핵’ ‘수고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등을 다 함께 수화로 배우면서 나와 다른 이의 존재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됐다.

이날 광장의 기쁨이 온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모두는 안다. ‘하루쯤은 기뻐하자’고 서로를 격려했지만 ‘비장한 새날의 시작’임을 모르지 않았다. 헌법질서에 위배된 대통령의 행위가 심판을 받았지만 죗값을 치른 것은 아니다. 그와 손발을 맞췄던 많은 이들도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 적폐청산은 찬반의 문제가 아니고, 누구만의 구호일 수도 없다. 광장에 모인 이들은 3월25일, 세월호 3주기 무렵인 4월15일 다시 모이자고 약속하며 헤어졌다. 봄은 그냥 오지 않겠기에.

이제 대선 레이스가 본격화했다. 광장에서 만났던 사람들이 새 대통령에게 바라는 얘기들은 하나같이 평범하고 당연한 것이었다. 일상처럼 정상적인 것들을 바랐다. 위정자들의 셈법으로 빼고 더할 것이 없다. 대선 주자들은 바람을 견디면서 더 예리해진 ‘촛불의 목소리’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김희연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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