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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정치권을 보면 저조한 기록이 예상되는 장거리 레이스가 떠오른다. 앞서 달리던 1등 주자는 눈에 띄게 지친 기색이다. 2등 주자는 출발부터 비틀거리면서 간신히 레이스를 이어간다. 1위 주자의 속도가 급격히 떨어지면서 1·2위의 차이는 좁혀지고 있다. 레이스의 수준은 갈수록 떨어지고 있고, 저조한 기록이 예상된다. 이대로라면 누가 1등을 하고, 누가 2등을 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여권은 페이스를 잃은 1등 주자 같다. 잘 나가는 초반 레이스에 취해 ‘한 번’은 오만했고, 2위 자유한국당의 저질체력에 ‘두 번’은 자만했다. 100m 밖에서 게걸음으로 쫓아오는 한국당을 뒤돌아보며 설렁설렁 달렸고, 가끔 뒤를 돌아보면서 “힘내” 하고 야유 섞인 빈정거림도 보냈다. 긴장감을 잃었고, 그러면서 집중력은 흐트러졌다.

잘못된 개각은 자만의 꼭짓점이었다. “우리는 그래도 괜찮다”는 자신감이 이런 인사를 단행한 배경이 됐다. 국민 눈높이에 맞지 않는 고위 공직자 인사에 대한 논란과 비판은 ‘이명박 정권’ 때 일인 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여론은 악화됐고, 4·3 보궐선거의 패배는 그 증거로 남았다. 예상을 넘어서는 싸늘한 반응에 여권은 당황한 듯하다. 이럴 때일수록 과정을 복기하고 주변을 둘러봐야 하지만, 오히려 방어적이고 공격적이 되어간다.

실제 여권 핵심부의 이런 심리상태는 확인됐다. 지난 11일 당·정·청 회의에서 “정부 관료가 말 덜 듣는 것, 이런 건 제가 다 해야…”(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진짜 저도 2주년이 아니고 마치 4주년 같아요”(김수현 청와대 정책실장) 등 발언이 공개된 것이다.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은 녹음 마이크가 켜져 있는 줄 모르는 상황에서 흘러나왔다. 의도치 않았겠지만, 조바심과 답답함이 고스란히 전달됐다.

민주당 지도부가 한국당을 향해 감정 섞인 조롱을 던지는 것도 불안함에서 비롯됐을지 모른다. “도둑놈들에게 국회 맡길 수 있느냐”(이해찬 대표)라는 말은 감정적이고 공격적이었다. 자신들이 만든 선진화법을 무시하고 동물국회를 만든 한국당 행태는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집권여당 대표의 언사로는 지나쳤다. 소위 ‘한국당 따위’와 격차가 좁혀지고 있는 현실을 인정할 수 없다는 생각이 깔려 있을 법하다. 게다가 이런 발언은 ‘오만한 여당 VS 한심한 야당’이라는 비호감 구도로 여권을 옭아맬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9일 취임 2주년을 맞아 KBS가 청와대 상춘재에서 진행한 <문재인 정부 2년 특집 대담-대통령에게 묻는다> 인터뷰에서 송현정 정치전문기자(왼쪽)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청와대 제공

문재인 대통령도 여유가 없어 보인다. 취임 2주년 대담 때 개각과 관련한 질문을 받자 “국민 눈높이에 때로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는 것은 겸허히 인정하고 있다”면서도 “인사참사라고까지 표현하는 부분은 저는 동의하지 않는다”고 했다. 집 세 채로 25억원의 차익을 남겼다는 장관 후보자, 국비로 외유성 해외출장을 떠나고 아들을 호화유학 보낸 장관 후보자 등을 보면서 서민들이 느꼈을 박탈감을 문 대통령이 모를 리 없다. 그런데도 문 대통령은 인사에 대한 비판을 수긍하지 않았다. 야권의 공세에 ‘밀리면 안된다’는 정치적 고려가 앞섰던 것은 아닐까.

설상가상, 레이스는 오르막길에 접어들었다. 경제는 어렵고, 내치동력을 제공했던 남북관계는 ‘하노이 노딜’ 이후 교착국면이다. 위기감은 속도를 내야 한다는 압박감으로 이어지고, 레이스의 근본전략은 흐트러진다. 

예컨대 문 대통령은 ‘국정농단’과 관련해 뇌물죄 유죄판결을 받고 대법원 확정판결을 앞둔 이재용 삼성그룹 부회장을 7번이나 만났다. 투자를 독려해 경제성과를 내야 한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일 터지만, 촛불의 힘으로 당선된 문 대통령이 국정농단에 연루됐던 이 부회장과 친분을 과시하는 모습을 보이는 자체가 어색하다. 현 정부가 내세웠던 ‘재벌개혁’과도 어울리지 않는다.

원칙을 잃어버린 1등, 여러모로 함량미달인 2등. 누가 이기든 최종기록은 좋을 것 같지 않다. 여권이 간신히 승리한다고 해도 뒷맛은 개운치 않을 것이다. 한국당에 간신히 앞선다면 그건 이긴 게 아니다. ‘종북좌파’ 메들리밖에 없는 한국당이 역전승을 거두는 상황은 아예 상상하기도 싫다.

뻔한 말이지만, 출발선에서 했던 다짐을 되새기는 수밖에 없다. 이 정부 성공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실패를 바라는 사람보다 아직은 많으며, 대통령 진심을 믿는 사람들이 한국당 막말에 솔깃해하는 사람보다 많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여권은 냉정하게 레이스에 임해야 할 것이다. 한반도 평화, 선거제와 권력기관 개혁 등에 대한 한국당 막말에 연연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인사참사, 초심을 잃은 듯한 경제기조에 대한 선의의 비판과 우려에는 귀 기울일 것을 권한다. 

‘4주년’ 운운하며 움츠러들 때가 아니다. 아직 반환점도 돌지 않았다.

<이용욱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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