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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에 따라 객석에 앉기 전 준비물이 달라진다. 코미디·액션·SF처럼 재밌는 영화에는 달콤 짭조름한 팝콘과 콜라가 필수다. 혼자 보러간 예술영화는 진한 커피 한 잔이 어울린다. 때론 주머니 속에 남몰래 티슈를 준비하게 하는 영화들도 있다. <아이 캔 스피크>는 팝콘을 먹다가 티슈를 꺼내게 했다.

‘프로민원러’ 나옥분(나문희) 할머니는 8000건의 민원 신고로 구청 직원들 사이 ‘도깨비 할머니’로 불린다. 어느날 이곳에 깐깐한 원칙주의자 9급공무원 박민재(이제훈)가 전근을 온다. 자신의 일터기이도 한 봉원시장을 순시하며 매일 민원 거리를 찾아내 신고하는 옥분. 그의 최대 민원 건은 재개발로 철거를 앞둔 시장 상가건물의 훼손을 막고 부당함을 고발하는 것이다. 새 구청직원 민재의 등장으로 여기에 사적인 민원이 덧붙여진다. ‘영어 배우기.’ 수업에 민폐를 끼친다며 영어학원에서 쫓겨난 옥분은 어느날 영어 잘하는 민재의 모습을 발견하고 영어를 가르쳐달라고 사정한다.

그러나 옥분이 신고한 산더미 같은 민원들로 가뜩이나 불만이 많던 민재는 부탁을 들어주지 않는다. 백과사전(encyclopedia), 생태학(ecology), 위도(latitude), 경도(longitude)…. 민재가 낸 단어시험에 80점을 받아야 청을 들어주겠다고 약속한다. 영화를 보며 속으로 단어 철자를 떠올려보는데, 80점 쉽지 않다. 옥분은 75점에 그치고 만다.

우여곡절 끝에 옥분과 민재는 학생과 영어 선생님이 된다. 두 사람은 우정을 나누는 친구처럼, 저녁 밥상에 함께 앉는 가족처럼 그런 관계가 된다. 하지만 옥분이 왜 그렇게 영어를 배우려 하는지 진짜 이유는 민재 역시 신문을 보고 알게 된다. 한평생 함께 일해온 시장 사람들조차 전혀 몰랐던 옥분의 과거는 무엇일까. 열세 살 소녀 옥분이 감당해야 했던 60여년 전 끔찍한 역사는 “잊으면 지는 거니께” 말하며 꺼내놓는 빛바랜 사진 한 장과 함께 드러난다.

영화 <아이 캔 스피크> 스틸 이미지

물론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옥분이 미 워싱턴 의회에서 “아이 캔 스피크”로 시작하는 증언 장면이다. 우리가 끊임없이 말하고 기억해야 하는 역사는 이렇게 친근한 옥분 할머니의 모습으로 다가와 진실을 밝히고 기억하자고 말한다. 이 영화의 미덕이다.

아직 진정한 사과를 받지 못한 일본 위안부 문제를 비롯해 우리 사회는 당장 말해야 할 것들이 넘쳐난다. 최근에 개봉해 관심을 모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택시운전사>, MB 정권과 박근혜 정권의 언론탄압을 그린 <공범자들> 등이 쏟아져 나온 것도 우연이 아니다. MB정권 4대강,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공영방송 장악 사태, 사법부 적폐, 역사교과서 국정화 문제,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태, 세월호 참사, 국정원의 각종 정치개입과 믿기지 않는 공작들까지….

특히나 국정원과 관련해 드러나고 있는 사실들에선 할 말을 잃을 정도다. ‘소리 없는 헌신, 오직 대한민국 수호와 영광을 위하여’라는 원훈을 내건 국정원이 직원을 시켜 시민들이 부여한 권력과 시간, 돈을 갖고 블랙리스트에 오른 배우의 누드사진을 합성해 인터넷에 유포하고 비판여론을 조작하는 댓글작전까지 폈다는 데 참담함마저 든다. 그사이 고통의 세월을 보낸 많은 사람들의 숨겨진 사연들이 하나둘씩 말하여지고 있다.

그러나 각 분야에서의 진상조사를 통한 적폐청산을 두고 “한풀이식 정치보복” “결국은 분열과 갈등만을 남길 뿐” 운운하며 논점을 흐리고 물타기 하려는 사람들도 분명 있다. 누군가는 “쓸데없는 국가적 소모전”으로 전락시키기도 한다. 정치적 안위와 기득권 지키기 말고 그들에게 중요한 것이 있을까 싶다. 진실을 밝히려는 시대적 당위와 요구에 ‘정치보복’이나 ‘국가적 소모전’을 갖다 붙이는 것은 가당치 않다.

얼마 전 대정부질문에서 국무총리가 답변해 화제가 된 “최순실 국정농단의 큰 짐을 떠안은 것을 저희들도 불행으로 생각합니다”를 곰곰 생각해보면 우리는 ‘불행’인 동시에 ‘다행’인 시대를 맞았다. 그동안 감춰지고 왜곡된온갖 문제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끄집어내 얘기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명명백백히 밝혀내 법의 심판대에 세워야 할 문제들에 대해서는 정면승부해야 한다. 역사 문제를 비롯해 세대를 아울러 오래도록 기억해야 할 것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두고두고 얘기하자. 우리는 말해야 하고 진실을 밝혀내야 한다. 바로잡고 또 기억해야 한다. 옥분 할머니의 말처럼 “다음 세대에 짐을 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당장은 힘이 들고 발걸음이 더뎌지더라도 그동안 묻혀 있던 말들을 쏟아내야 한다. 영화 말미 비로소 활짝 웃는 옥분 할머니처럼 우리도 ‘위 캔 스피크(We can speak)’.

<김희연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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