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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은 부족해도 사람이 살아있던 시절이었다. 골목길을 따라 늘어선 집들에서는 사람 냄새가 났다. 나와 남이라는 경계가 모호하던 그때, 좋은 옷과 맛난 음식이 아니어도 그렇게 부끄럽거나 자존심 상하지 않았다. 그 푸르른 날을 살았던 젊음들은 참 밝고 깨끗해 보였다.

최근 종영한 <응답하라 1988>이 그려낸 풍경화다. 많은 사람들처럼 필자 역시 “그래 그 시절은 참 괜찮았어”라며 그때를 곱씹기도 했다. 하지만 그 시절 청춘들의 삶이 정말 드라마 속 풍경처럼 그렇게 정겹고 빛나기만 했을까.

우리는 과거를 아름답게 기억하곤 한다. 음식을 먹어도 옛날 어머니가 해주시던 그맛이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고, 시골풍경만 나와도 옛집을 떠올리며 지그시 담배를 문다. 이처럼 과거를 다시 돌아가고 싶은 시절로 추억하는 것은 정말 그때가 살 만했고 아름다워서일까?

‘응팔’의 그 시절에도 아픔과 시련은 많았다. 1987년 6·10항쟁의 현장이 잠깐 비치긴 했지만 그 당시 대학생들은 마지막 저항을 계속하던 군부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엄청난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고교생들은 학교로 독서실로 대학입시에 매달렸고, 젊음들은 저마다의 삶을 위해 가슴앓이를 했고, 부모들은 부모들 나름대로 자식 키우기에 힘들어 했다. 지금이나 그때나 이 땅을 살아야 했던 청춘의 삶은 누구랄 것도 없이 오십보백보였다. 게다가 마지막 장면인 1995년 보라의 결혼식에서 사진사를 향해 “동네친구들”이라고 외쳤던 그 청춘들은 불과 2년 후에는 한국사회의 모든 가치관을 뒤흔들고, 공동체 구성원 서로가 서로에게 칼을 겨눴던 외환위기와 맞닥뜨려야 했다.

그 아수라의 세상에서 그들은 어떤 삶을 살아갔을까. 동룡의 음식점은 문을 닫을 수도 있겠고, 덕선은 그렇게 자랑스러워했던 직장에서 쫓겨나지 않았을까.

20대 총선 투표 정당 후보_경향DB


이처럼 인간의 삶은 행복과 불행이 번갈아 일어남에도 과거를 아름답게 기억하는 것은 과거의 문제가 아니다. 해답은 지금 우리가 서 있는 현재에 있다. 이 시대가 주는 결핍 때문이다. 현재의 결핍과 이루어지지 않는 나의 욕망이 씨줄과 날줄처럼 얽혀 과거를 아름답고 살 만했던 것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불가에서는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을 말한다. 처하는 곳마다 주인공이 되며, 서있는 그곳이 오직 진실일 뿐이라고. 곧 현재를 살라는 말이다. 생생히 살아 숨쉬는 지금만이 진실일 뿐 지나가고 다가올 것들은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응팔’의 그 젊음들도 시절인연에 따라 그 시대를 열심히 살아갔다. 어찌 영상 속에 그려진 그것만이 그 시절 청춘들의 모습이겠는가. 정도만 다를 뿐 당시 청춘들이 겪어야 했던 아픔과 힘겨움 역시 오늘의 청춘들과 그리 크게 다르진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2016년 이땅의 청춘들 역시 이 시대를 제대로 살아가야 한다. 기성세대와 기득권자들이 짜놓은 판 위에서 웃고 울고 춤추는 광대로서가 아니라 판을 새로 짜는 주인공으로서 살아가야 한다. 그럼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명약관화하다. 물론 정치권력, 자본권력, 관료권력들의 그물망은 촘촘하기 그지없다. 이들 3대권력은 서로를 도닥이며 기득권 지키기에 여념이 없다. 공정한 심판자가 돼야 할 대통령은 이미 룰의 집행자로서 자격을 잃어버렸다. 민주주의의 원칙인 삼권분립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재벌이 벌인 서명판에 스스로 펜을 들고 뛰어들어 서명까지 해댄다. 이에 재벌기업들과 관변단체들은 뒤질세라 서명운동에 동참하고 있다. 가관도 이런 가관이 없다. 알다시피 이명박·박근혜 정권은 청춘들의 피가 찬물처럼 식어 버렸다는 것을 일찍이 간파했다. 우리들이 나의 앞길만을 생각하는 파편화된 삶에 골몰하고 있음을 그들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위태롭다. 퇴행을 거듭하고 있는 민주주의와 정체된 경제활력, 극우로 치닫는 사회분위기와 북핵위기에 기인한 멀어지는 통일의 꿈 등등. 무엇보다 청년들에게 현실은 암울하기 짝이 없다. 그렇다고 시대만을 탓하고 자포자기하며 살아갈 수는 없다. 더 이상 ‘헬조선’ ‘삼포세대’ ‘이생망’이라는 말로 스스로를 비하하거나 패자의 절망 속에 허덕이고 있어서는 안된다. 현재 자신이 있는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분노해야 한다. 바꿔야 한다.

2개월여 후면 우리 공동체의 명운을 가를 총선이 다가온다. 지금 이 땅을 살아가는 선우와 보라, 택이와 덕선, 정환과 동룡이 곧추세워야 할 시대적 화두는 무엇일까. 이 위태로운 시대를 향해 청춘들은 어떤 응답을 할 수 있어야 할까. 응답하라 2016.


배병문 | 대중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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