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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저녁을 먹을 수 있는 것은 푸줏간 주인, 양조장 주인, 혹은 빵집 주인의 자비심 덕분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그들의 욕구 때문이다”라는 문장은 240년 전에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내린 경제학의 현대적인 정의입니다. ‘보이지 않는 손’을 뜻하는 유명한 이 문장은 대학입시에서도 자주 출제되고 있지요.

‘유쾌한 페미니스트의 경제학 뒤집어보기’라는 부제가 붙은 <잠깐 애덤 스미스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카트리네 마르살, 부키)에서는 이 문장을 색다르게 해석하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애덤 스미스는 식탁에 앉았을 때 푸줏간 주인과 빵집 주인이 자신에게 친절을 베풀어서 저녁 식사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바로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욕구가 교환을 통해 충족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애덤 스미스의 저녁 식사가 식탁에 오른 것은 자기 이익을 추구하려는 욕구 때문이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그렇다면 스테이크를 실제로 구운 것은 누구였을까?”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저자가 제시하는 정답은 애덤 스미스의 어머니인 마거릿 더글러스입니다. 애덤 스미스는 평생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유복자로 태어난 그를 돌본 이는 28세에 홀로 됐지만 재혼하지 않고 오직 아들만을 따라다닌 그의 어머니였습니다. 애덤 스미스의 전기를 쓴 존 레이는 “그의 어머니는 처음부터 끝까지 스미스 삶의 중심이었다”고 평가했습니다. 저자는 애덤 스미스가 그런 어머니를 망각하는 바람에 “그에게서 시작된 사상의 갈래가 근본적인 무언가를 생략하고 말았다는 사실”이 오늘날까지 많은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며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펼칩니다.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이 하루 약 2500원 이하로 먹고살”고 있고 “그중 대다수가 여성”입니다. 수많은 여성들이 단지 먹고살기 위해서 국경을 넘어야 하는 세상일 뿐만 아니라 “많은 나라에서 전업주부로 아이들을 돌보는 여성들은 사회의 상류층과 하위 계층에 전적으로 몰려 있”는 현실에서 “경제적 불평등이 더 심해질 것이라는 예상이 왜 나오는지 이해하려면 페미니스트의 관점에서 경제학을 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즉, “애덤 스미스의 저녁이 어떻게 식탁에 올라왔는지, 그것이 경제학적으로 왜 중요한지를 따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경제학자 폴 새뮤얼슨이 <국부론> 발간 200주년 기념행사에서 시대와 국가를 초월해 참다운 지식인이 반드시 읽어야 할 세 권의 교양 필독서로 <성서>와 <자본론>, 그리고 <국부론>을 꼽았을 정도이니 경제적 위기가 닥칠 때마다 애덤 스미스의 존재감이 커지는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황준성 숭실대 교수는 <고전 콘서트>(꿈길)에서 세계경제의 50년 주기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1880년대 세계경제가 크게 침체에 빠지고 나서 회복된 후, 다시 1930년대 대공황과 1980년대 스태그플레이션이 밀어닥쳤습니다. 이처럼 50년 주기의 관점에서 볼 때, 현재 세계경제는 2008년 세계 금융위기를 초래하면서 후퇴기에 접어들었으며, 2030년경 세계경제는 구조적 침체기 또는 불황의 시기가 될 것으로 예측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세상의 변화에 맞춰 애덤 스미스를 읽는 남다른 통찰력이 발휘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경제학 팩션이라는 틀로 애덤 스미스의 사상을 정리한 조너선 B 와이트의 <애덤 스미스 구하기>(북스토리)에서는 애덤 스미스가 자동차 수리공의 영혼에 빙의해서 나타나 하는 말로 지금에도 그의 생각이 유효한 이유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오해는 말게. 경제 체계가 자유시장 쪽으로 이동하는 것에 대해서는 나도 기쁘게 생각하니까 말이야. … 아무튼 내가 다시 돌아온 이유는, 시장이 원활하게 돌아가게 하는 것의 본질이 무엇인지 자네 같은 경제학자들이 한결같이 모두 놓쳐버렸기 때문이지. 사회 속에 존재하는 시장이 원활하게 돌아가게 하는 것의 본질! 내 말, 알아듣겠나?”

유시민도 <국가란 무엇인가>(돌베개)에서 애덤 스미스가 한국의 현실에서 유효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이데올로기는 여전히 강력한 힘을 떨치고 있다. 보수적인 정치인이나 경제학자, 기업연구소 박사들이 방송 카메라 앞에서 ‘이것은 시장에 맡겨야 한다’고 말할 때, 그들이 마음속으로 경배하는 수호성인은 바로 스미스다. 그런데 국가의 역할을 확장하려는 진보 지식인과 정치인들도 ‘공공재’에 대한 스미스의 이론을 적극 활용한다. ‘국가의 공공성’을 주창하면서 되도록 많은 것들을 ‘공공재’라는 집합에 담으려고 한다. 교육, 보육, 의료, 주택 등이 모두 공공재 성격을 가지기 때문에 국가가 큰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한다. 이 둘 모두를 스미스는 예상하지도 원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런 현실에서 ‘경제학의 아버지’인 애덤 스미스의 사상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애덤 스미스 구하기>에서는 신자유주의자들의 생각을 압축한 슬로건인 “안정화하라! 자유화하라! 민영화하라!(Stabilize! Liberate! Privatize!)”는 뜻의 S-L-P에다 ‘J’(Justice)를 앞세우자고 주장합니다. 소설 속의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의 토대가 된 <도덕감정론>을 제발 무시하지 말아달라고 호소합니다. 철학자 서동은은 <곡해된 애덤 스미스의 자유경제>(길밖의길)에서 ‘공감’이야말로 “같이 사는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기 때문에 혹은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최소한의 인간의 예의”라고 지적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농단’으로 지배권력의 사적 이익 챙기기가 만천하에 드러난 지금, 우리는 애덤 스미스를 정말 새롭게 다시 읽어야 할 것 같습니다.

한기호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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