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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으로 쫓겨난 박근혜 전 대통령은 7시간 이상 검찰조서를 꼼꼼하게 수정했다고 합니다. 이런 그가 세월호가 침몰해 300명 이상의 목숨이 죽어가는 7시간 동안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마도 사이코패스가 아니었을까요? 여성학자 정희진이 <낯선 시선>에서 밝혔듯이 “사이코패스는 뭔가 특이하고 천재적인 나쁜 재능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이코패스는 단순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능력이나 노력에 걸맞지 않은 권력을 갖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 사이코패스”라고 합니다. 사이코패스는 신체적으로 성장할 뿐 감정적으로는 전혀 성장하지 못합니다.

손원평 장편소설 <아몬드>의 주인공 ‘나’(선윤재)는 아몬드를 닮은 편도체의 이상으로 ‘알렉시티미아, 감정 표현 불능증’이라고도 불리는 치명적인 질환을 앓고 있습니다. 이 질환의 가장 큰 특징은 감정, 그중에서도 공포를 느끼는 감각이 둔해져서 웃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웃지도, 겁을 내지도 않는 ‘괴물’일지언정 부모에게는 소중합니다. 엄마는 “사랑도, 두려움도, 감정과 공감이라는 것도 막연한 활자에 불과하다”는 감정 불능 상태에 빠진 ‘나’를 위해 삼시 세끼 아몬드를 먹입니다. 희로애락애오욕 7자를 그려서 부적처럼 집안 곳곳에 붙여놓고는 ‘희로애락애오욕’ 게임까지 만들었습니다. 엄마가 상황을 제시하면 ‘나’가 감정을 맞춰야 합니다. “누군가가 맛있는 음식을 준다면 느껴야 할 감정은? 정답은 기쁨과 감사. 누군가가 나를 아프게 했을 때 느껴야 할 것은? 정답은 분노. 이런 식이었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하지만 ‘나’의 공감 불능은 해결되지 않습니다. 최순실이 고쳐준 글들을 열심히 읽은 박 전 대통령이 국민의 아픔을 전혀 느끼지 못한 것처럼요.

크리스마스이브, ‘나’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외식을 나간 날, 한 사내의 ‘묻지마 살인’으로 할멈은 죽고 엄마는 식물인간이 됩니다. 전형적인 소시민이었던 범인은 오로지 웃는 사람을 선택해 저승길 동반자로 삼았습니다. 그 순간에도 ‘나’는 어떤 공포도 느끼지 못합니다. “내 안에는 감정 대신 질문들이 떠다니고 있었”을 뿐입니다.

이 사건 이후 ‘괴물’인 ‘나’는 감정의 형식을 암기하는 대신 질문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상상합니다. 그때 다른 ‘괴물’인 ‘곤’이 나타납니다. 어릴 적 엄마를 잃어버리고 여기저기 입양 다니며 불행한 삶을 살다가 소년원까지 들어갔다 오게 된 ‘곤’이는 한껏 삐뚤어지고 방황하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곤’이를 무서워하지만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는 ‘나’는 곤이에게 겁도 없이 다가갑니다.

‘나’ 역시 ‘곤’이의 삶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상상해보려는 노력은 합니다. ‘나’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해준 또 다른 ‘괴물’인 ‘도라’의 삶 역시 그렇습니다. ‘나’는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았던 도라가 왜 달리고 싶어 하는지에 대해 묻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질문이 이들의 삶을 바꿉니다.

감정이 고장 난 인간이라고 해서 특별하고 별난 사람은 아닙니다. 공감이라는 말을 달고 사는 사람들마저도 감정의 형식만 알 뿐 공감할 줄 모릅니다. 텔레비전 화면 속에서는 “폭격에 두 다리와 한쪽 귀를 잃은 소년”이 거의 날마다 등장하지만 바라보는 사람들의 얼굴은 늘 무표정합니다. “비슷한 모습을 누구에게서나 볼 수 있었다. 채널을 무심히 돌리던 엄마나 할멈도 마찬가지였다. 너무 멀리 있는 불행은 내 불행이 아니라고, 엄마는, 그렇게 말했었다.”

할멈과 엄마가 칼을 맞는 날도 그랬습니다. 사람들은 ‘묻지마 살인’을 아무도 말리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나’마저도. 비극적인 이미지들이 범람하는 요즘 같은 시대에 감정 표현 불능의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자주 마주하게 됩니다. 그들은 보통의 아몬드를 가진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누구나 아몬드를 가지고 있습니다. 모두가 아몬드를 가지고 있어도 타인의 삶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고 관심 갖지 않는다면 공감의 꽃을 피울 수 없습니다. 내가 없던 시간, 내가 아닌 타인에 대해 상상해보는 것은 공감의 씨앗입니다. 아몬드가 있다는 것만으로는 아몬드의 나무가 어떻게 생겼는지, 아몬드 나무의 꽃은 어떻게 피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씨앗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약속이자 희망입니다. 감정 표현 불능증을 가진 ‘나’도 아몬드라는 씨앗을 가지고 있었기에 결국 감정의 꽃을 피울 수 있었습니다.

이야기는 타자를 상기시키고 고통을 표현하며 타인의 삶을 상상하게 만듭니다. 작가는 서두에서 “그 끝이 비극일지 희극일지를 여기서 말할 생각은 없다”고 밝힙니다. <아몬드>는 비극이 될지, 희극이 될지 모르는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공감 불능으로 고통받는 아이들을 치유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한국형 영 어덜트로 볼 수 있는 <아몬드>는 아프게 읽힙니다. 단숨에 읽히는 이 소설은 아마도 침체된 한국 문단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올 것으로 여겨집니다. 영미권의 영 어덜트는 현실을 초월하거나 도피할 수 있는 판타지를 제공하는 로맨스 판타지가 주류였다가 최근에는 10대의 주인공이 ‘삶 아니면 죽음’이라는 가혹한 선택에 직면하는 이야기로 바뀌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아몬드는 세계적인 흐름과도 맥이 닿아있습니다. 이 소설이 널리 읽혀 아몬드의 꽃이 피듯, 우리 사회의 비극적인 삶들이 서로의 아픔과 상처를 온몸으로 끌어안고 고통 위를 기어 조금씩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한기호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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