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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람이 몰아치는 날 창밖을 바라보라. 바깥세상은 저토록 모진 풍파에 시달리지만 실내에 있는 나는 아늑하고 안전하다. 그건 좋은데 이따금씩 어떤 걱정이 들 때가 있다. 이 궂은 날씨 속에서 다른 동물은 과연 어떻게 지내는지 염려가 되는 것이다. 비를 피하기라도 하는 걸까, 바람에 실려 원치 않은 여행이라도 하는 건 아닐까. 언제나 바깥에 있어야 하는 삶은 어떨지, 견고한 은신처에 숨어 지내는 우리로서는 상상하기 힘들다. 


야생의 생활에 적응된 동물들은 물론 제 나름대로의 대처 방안을 가지고 있다. 땅에 굴을 파고 들어가 있거나, 잎이 풍성한 나무속으로 피난을 가기도 한다. 사람들과 가깝게 사는 종은 처마 밑이나 지붕 틈새 등 인공 구조물을 이용할 줄도 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모든 동물이 험한 날씨로부터 도망다니진 않는다는 사실이다. 조금만 노력하면 더 안전한 곳을 찾을 법한데도 그냥 있던 곳에 머무는 녀석들이 있다. 차가운 눈이나 뜨거운 햇볕을 그대로 감수하면서 말이다. 열대우림에서 영장류를 연구하는 나도 이런 광경을 여러 번 보았다. 옆 나무로만 가도 훨씬 나을 텐데 긴팔원숭이는 쏟아지는 소나기를 묵묵히 맞으며 그냥 끝나기만을 기다리곤 했다. 마음 같아선 우산이라도 나눠 쓰고 싶었지만 심히 부담스러워할 것 같아 참았던 기억이 있다.



비가 오면 좀 젖는 것이 당연하다는 자세, 어쩌면 우리에게 이것이 부족해서 이들의 행동을 이상하게 여기는 건지도 모른다. 어떤 동물이든 체온과 몸 상태를 알맞게 관리하려 하지만, 환경에 적절히 반응할 뿐 거스르려고 하지는 않는다. 웬만하면 환경과 대적하려는 우리와는 참으로 다른 모습이다. 우리는 일 년 내내 자연에 반(反)하느라 여념이 없다. 아직 봄이라도 조금만 답답하면 에어컨을 가동하고, 아직 가을이라도 조금만 서늘하면 보일러를 튼다. 대중교통 운영자들은 어느 계절이든 너무 춥다는 사람과 너무 덥다는 사람의 이중 민원을 해결하는 데 안간힘을 쓴다. 심지어 위에서는 냉방이, 아래에서는 난방이 나오는 충격적인 지하철을 타본 적도 있다. 비가 오는 날에도 모든 공간은 절대적으로 뽀송뽀송해야 하므로 수십만장의 일회용 비닐이 난잡하게 쓰였다 버려진다. 우리는 밤이 되면 어두워지는 법칙도 수용하길 거부한다. 영업이 끝난 상점도 불을 켜고, 수술실을 방불케 하는 형광조명이 편의점마다 쨍쨍하다. 물론 낮은 낮대로 부정된다. 산책을 나가는 이들도 용접가면 수준으로 얼굴을 가리고, 건물은 일부러 창을 없애는 대신 ‘간접조명’으로 내부를 밝힌다. 더위와 추위, 빛과 어둠, 물과 흙, 모두 제거되거나 철저하게 통제되어야 하는 무엇이 되어버렸다.


실내의 에어컨때문에 냉방병에 걸린 여성이 고통스러워 하고 있다. (경향DB)


야생에서 살 수 없는 현대인이 살기 위해 자연을 통제하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그것이 과할 때가 문제이다. 자칫하면 우리의 감각과 감수성이 변질되기 때문이다. 여름은 여름이기에 마땅히 더워야 하지만, 냉방병으로 여름철을 보내고 나면 더위의 이 마땅함이 점점 사라진다. 계절과 상반된 환경에 익숙해진 사람은 그 계절에 대한 소속감을 가질 수 없다. 우리는 단지 더워서 냉방을 하는 것만이 아니라, 여름의 더위를 인정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적정 온도를 찾는 대신 ‘빵빵한’ 냉방을 요구하는 것이다. 더위와 추위를 완전히 없애겠다는 의지가 느껴지는 공간에서야 비로소 편안함이 찾아오는, 그런 감각과 감수성의 소유자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동물들이 이런 걸 다 알아서 비를 맞고 있는 건 아닐 것이다. 그들의 속을 다 알 수는 없지만, 그저 자연이 그날그날 선사하는 날씨를 나름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문명의 이기가 없어서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이들은 자신의 몸이 쾌적함의 극상에 있도록 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지는 않다.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도 따뜻한 곳을 찾는 데는 귀신이지만, 보일러를 올려달라고 요구하지는 않는다. 우리보다 덜 똑똑하지만, 우리보다 점잖은 구석이 있다.


(경향DB)


우리는 평범한 일상생활이 전 지구적 문제를 일으키는 시대에 살고 있다. 지구온난화는 우리 모두가 살면서 쓴 에너지가 모여서 생긴 결과이다. 어쩌면 세계 역사상 처음으로 모든 사람이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 닥친 것이다. 동시에 모든 사람이 뭔가 보탬이 될 수 있는 장이 열린 것이기도 하다. 창문을 통해 바깥 경치를 구경만 할 게 아니라, 세상을 한껏 만끽하는 화려한 외출이 필요한 시대이다.


김산하 | 영장류 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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