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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이렇게는 말해도 될 것 같다. 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대선 후보(이하 경칭 생략)는 ‘정치적’으로 죽지 않았다. 한국당에서 ‘자연인’(김성태 원내대표) 취급을 받는 홍준표의 소위 ‘현실정치 복귀’ 선언이 불러온 요란한 울림을 보면 그렇다. 포털의 홍준표 복귀 기사에는 어김없이 찬반 댓글이 불붙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의 반향도 여느 정치인보다 강렬했다. ‘수구보수 소멸이라는 대업을 이뤄주길 바란다’는 식의 냉소와 비판, 부정 여론이 많지만 그렇다고 압도하지는 않았다. 긍정적 호응도 적잖다. ‘강성 귀족노조 때려잡겠다던 홍준표를 몰라본 것이 천추의 한” 같은 격한 지지, “홍의 말들을 다시 들어 봤는데 그의 말이 상당히 맞고 그렇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에 놀랐다”는 인정도 동반한다. 아마도 홍준표를 감읍케 한 것은 “좌파들 하는 짓거리를 보면 대한민국은 홍 같은 스트롱맨이 더욱 필요하다”는 식의 극우로부터 들리는 메아리일 터이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8년11월21일 (출처:경향신문DB)

패륜적 막말과 극단적 정책을 휘둘러 한국당 지방선거 참패의 원흉으로 지목돼 ‘CVID(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불가역적인) 사퇴’를 강요받던 홍준표의 처지가 아니다. 애써 ‘현실’ 정치 복귀로 포장한들, 분명 이벤트 선언임에도 열렬한 관심이 쏟아졌다. 비상 대권을 가진 김병준 비대위원장도 누려보지 못한 각광이다. 홍준표의 경쟁력 때문이라는 데는 동의하기 어렵지만, 한국당 인사 중 가장 대중적이라는 데는 수긍할 수밖에 없다. 미국 정치의 이단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체현해 보인 게 있다. ‘나쁜 평판은 때로 평판이 없는 것보다 낫다. 간단히 말해 논란은 장사가 된다.’ 홍준표는 이 장사를 할 줄 안다.

“우리는 참패했고 나라는 통째로 넘어갔다. 모두가 제 잘못이다”(6월14일 기자회견)라며 떠날 수밖에 없었던 홍준표다. 채 반년도 안되어 “대선이나 지방선거 때 홍준표의 말이 옳았다는 지적에 힘입어 다시 시작하고자 한다”고 당당하게, 아니 뻔뻔하게 돌아올 수 있게 만든 뒷배는 누구일까. ‘프리덤코리아’를 결성해 “이 땅의 지성들과 ‘네이션 리빌딩’ 운동을 펼칠 것”이라고 치서는 동력은 무엇일까. 단순 ‘홍키호테의 똘끼’로 넘길 수만은 없다. 나르시시즘과 극단의 이념, 막말이 교집된 ‘복귀 선언’에 실마리가 담겨 있다. “금년 초부터 문재인 정권의 좌파 갑질 경제는 연말이면 나라를 거덜 낼 수도 있다고 경고하면서 지방선거 때 ‘경제를 통째로 포기하겠습니까?’ 호소했고, 북핵 폐기 문제도 ‘나라를 통째로 넘기겠습니까?’라고 호소한 바 있다. 내 죄가 있다면 ‘세상을 미리 말한 죄’뿐인데 그걸 좌파들은 떼지어 막말이라고 매도했고 당내 일부 반대파도 동조했다.”

문재인 대통령 지지율이 하락해 과반을 겨우 지탱하고, 특히 경제 상황의 악화가 안 그래도 몸단 홍준표를 불러냈을 것이다. 경남지사 당시 폭력적으로 진주의료원을 폐원하면서 대척했던 민주노총을 둘러싼 논란이 확산되는 상황도 그를 추동했을 터이다. 한편으로 인적 쇄신과 개혁은 간데없는 한국당의 좌초가 ‘홍준표 복귀’의 자양을 제공했다.

제임스 퍼거슨 스탠퍼드대 교수는 <분배 정치의 시대>에서 포퓰리즘의 재료로 이민, 불평등, 기존 정치에 대한 신뢰 붕괴, 경제위기, 탁월한 선동가 등 다섯 가지를 꼽았다. 불평등과 정치 불신, 경제 문제 등은 한국에서도 충분히 재료로 갖춰져 있다. 넉넉히 존재하는 불평등과 정치불신은, 불안과 분노를 이용한 정치가 출현하기 더없는 연료이다. 트럼프 같은 ‘탁월한 선동가’가 등장하면 포퓰리즘은 언제든 폭발할 수 있다.

좌익이든 우익이든, 포퓰리즘은 실패를 먹고 자란다. 정치가 실패하면 포퓰리즘은 되살아난다. 강제 퇴장 반년도 안되어 이데올로기적 분열의 정치 홍준표가 ‘당당하게’ 돌아왔다. 혁신 작업에 실패한 한국당, 이 시대 불안과 분노의 근원인 불평등 해소와 청년실업 등에서 성과를 내지 못하는 문재인 정부가 만들어낸 풍경이다. 두 번의 선거에서 밑천이 드러난 홍준표야 (여당의 기대대로) 한국당 해체의 트로이목마 구실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초점은 홍준표 ‘자연인’이 아니다. ‘홍트럼프’를 불러내는, 극우 포퓰리즘을 초대하는 우울한 신호가 깜박거리는 것이다.

‘괴물’ 트럼프 대통령 탄생이 현실화됐을 때이다. 미국 외교정책포커스 소장 존 페퍼는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설마 이런 일이 여기서(미국) 발생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틀렸던 것이다. 유럽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기우이기를 바라지만, ‘여기서’에 ‘한국’을 대입해야 할 날이 머지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극단의 포퓰리즘에 대항하는 사회구조를 튼튼히 하지 못하면, 그날은 더 당겨질 수밖에 없다.

<양권모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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