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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칼럼

[여적]호시우보(虎視牛步)

opinionX 2018. 11. 27. 14:13

예전에는 가족을 식구(食口)라 불렀다. 밥상을 함께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소는 생구(生口)라고 했다. 먹여 키워야 할 ‘식구’라는 의미이다. 묵묵히 논밭을 갈고 수레를 끄는 듬직한 소는 가축 이전에 가족의 대접을 받았다. 농경 민족인 우리에게 소는 가장 친숙한 동물이다. 그러나 소에 대한 인식은 항상 좋지만은 않았다. 소는 꾸준함과 성실함의 상징이지만, 다른 한편 어리석음의 표상이기도 했다. 아무리 가르쳐도 알아듣지 못한다는 ‘쇠귀에 경 읽기’가 대표적 사례이다.

지난 20일 청와대에서 열린 반부패정책협의회에 참석한 조국 민정수석. 연합뉴스

‘소 걸음’을 뜻하는 우보(牛步)에도 양가적 의미가 들어 있다. 지나치게 느려 답답한 소의 걸음걸이로 해석한다면 좋지 않은 뜻이다. 옛 문인들은 ‘우보’를 부정적 의미로 자주 사용했다. 달팽이와 소의 느린 행보를 뜻하는 ‘와행우보(蝸行牛步)’가 대표적이다. 지금도 중국인들은 행동이나 발전이 매우 느리고 답답할 때 이 말을 자주 쓴다. 반면 멀리 내다보며 신중하게 가자는 긍정의 뜻도 있다. ‘청춘예찬’의 작가 민태원의 호 ‘우보’에는 소처럼 꾸준히 나아가겠다는 욕망이 투사돼 있다. 소 걸음으로 만 리를 간다는 ‘우보만리(牛步萬里)’ 역시 소의 성실한 이미지를 잘 드러낸다.

소 걸음의 미덕을 잘 표현한 성어는 ‘호시우보(虎視牛步)’이다. 소처럼 신중하게 걸으면서 호랑이처럼 주시한다는 뜻이다. 고려 후기 문인 민지는 일연 스님의 생애를 기록한 ‘보각국사비문’에서 이 말을 인용했다. 스님이 몽골 침략기와 원 간섭기를 ‘호시우보’하며 “무리 속에서 홀로 있는 듯하고, 존귀함과 비천함을 같이 생각했다”고 적었다. 스님의 84세 생애가 호랑이의 눈초리를 하면서도 걸음걸이는 소처럼 여유로웠다는 것이다.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이 25일 페이스북에서 문재인 정부 출범 1년 반을 회고하며 “한 번에 ‘비약’은 못할지라도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것”이라며 ‘호시우보’하겠다고 적었다. 이를 두고 문재인 정부의 국정기조를 대변하는 말이 아니냐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호시우보’는 멀리를 보는 원시와 가까이를 보는 근시가 함께 갖추어져야 가능하다. 문재인 정부가 발아래의 적폐를 놓치지 않으면서 인간과 노동이 중심에 서는 국정철학을 견지해 가길 기대한다.

<조운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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