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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생산직의 교육과 숙련을 이야기해보려 한다. 생산직은 IT산업, 서비스산업과 금융산업 위주로 재편된 수도권에서는 잊혀진 이름이 되어버렸다. 이들은 산업화 경제를 이끌었던 ‘산업 역군’이었고, 민주화를 이룰 때 앞장선 ‘민주노조운동’의 선봉이었다. 그러나 어느새 대형 사업장의 ‘대기업 귀족노조’라는 이름이거나 비정규직 하청 노동자라는 이름으로 한국 사회의 문제를 만들어내는 말썽꾸러기나 한국 사회의 문제가 집약된 피해자로만 등장하게 돼버렸다. 풀어야 할 문제들은 방치되는 중이다.
우선 한국 사회에서 생산직에 대해 미디어가 연출한 장면을 지적하고 넘어가야 한다. 울산이나 창원 등 산업도시에서 경기침체나 기업의 위기가 올 때, 가장 먼저 미디어에서 뽑아내는 장면은 다음과 같다. “불 꺼진 ○○○”. 불 꺼진 장소는 유흥주점과 식당들이 군집한 유흥가를 의미한다. ‘대기업 귀족노조원’ 남성들이 지금까지 임금을 많이 받아서 흥청망청 살다가 그 꼴이 났다는 것을 암시한다. 지역 경기가 왜 술집에만 해당되는 일일까? 안일하고 악랄한 연출이다. 삼성 반도체 공장이나 구미의 LG 디스플레이 공장에서는 여성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다. 미디어는 어려울 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잠도 잊고 끼니도 거른 채 ‘돌관작업’(공기를 줄이기 위한 밤낮없는 작업) 등 고군분투하는 백전노장 노동자들의 이야기도 무시한다. 자격증을 수십개 따고 방송대학을 다니는 노동자의 배움도 무시한다.
한국에서 생산직 노동자들은 정규직 노동자들과 사내 가공 하도급 노동자, 하청 노동자 등으로 구분된다. 이들 거의 모두는 금액의 차이만 있을 뿐 호봉으로 기본급이 결정되는 연공서열제 안에 있다. 연공서열제를 한국보다 먼저 채택한 나라는 일본이다. 일본 기업들이 연공서열제와 정년보장을 택했던 이유는, 생산성을 높이는 노동자들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려 했기 때문이다.
‘도요타 생산방식’으로 잘 알려진 혁신의 체계는 노동자들의 높은 숙련과 학습으로부터 출발했다. 임금이 올라가는 만큼 숙련 수준이 올라간다는 전제가 있었다. 노동자들은 작업장 정리부터 세세한 것 하나하나 개선하면서 생산성을 극대화시켰다. 한국도 마찬가지였다. 민주노조운동의 영향으로 정규직 고용안정이 보장됐다. 제조대기업들은 1990년대 설비 등 대규모 자본재 투자를 했지만, ‘미세작업관리’ 등으로 알려진 생산혁신 활동에도 박차를 가했다. 노동조합과 회사는 생산성과 고용안정을 서로 주고받으면서 상생할 수 있었다. 제조대기업의 성공은 성실하게 숙련을 쌓아올린 생산직의 성공이기도 했다.
생산직의 교육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이제 제조업 고용을 예전처럼 지키기 어렵다는 생각 때문이다. 숙련으로 인건비를 만회하기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자동화로 숙련의 영향이 줄었고, 글로벌 경쟁 속에서 완성품 대공장이 노동자를 예전처럼 많이 고용하기 힘들어졌다. 전체 노동이 줄어든 상황에서 고용이 보장되는 이들을 뺄 수 없으니 하청·하도급 노동자들을 늘렸다 줄였다 하게 된 부분도 적지 않다. 기업들이 이미 국내 생산단가가 맞지 않아 해외 생산이 많이 늘어난 상황이다. 중국·동남아의 인건비는 차치하고 미국의 이민노동과 경쟁하는 것마저 쉽지 않아 보인다. 노동자들로서는 생산성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숙련도를 향상시키는 게 어렵다면, 인접 기술이나 공학을 배우고 익혀서 상위 직무로 배치되거나 다른 기업으로 옮겨야만 한다. 생산직들이 결국 무엇인가를 배워야 한다는 현실적인 문제가 남는다. 물론 정책의 몫은 더 크다.
아이디어를 많이 주는 나라는 독일일 것 같다. 독일에서 중학교 이후 직업교육과 학문교육으로 진로가 나뉘는 것까지는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생산직 직업교육을 받더라도, 인턴십을 진행하고 취업을 하는 과정 그리고 취업을 하고 나서도 끊임없이 국가와 지방정부가 배움의 체계에서 관리하는 것이 핵심이다. 한국의 표현으로는 평생교육, 독일의 표현으로는 ‘계속교육’이 이어져 직업 전망과 연결된다. 국가는 기업들과 노동조합의 참여를 통해 직무 표준을 지속적으로 업데이트한다. 연방직업교육연구소(BIBB)는 산업체가 요구하는 기술을 배울 수 있는 과정을 개설하고 국가자격증을 만들어낸다. 기업은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직무기술이기 때문에 이를 인정한다. 더불어 연공서열에 따른 임금의 편차를 줄이고 직무수준으로 임금을 매길 수 있게 표준화했다. 기술이 있고 배우려는 의욕만 있다면 임금하락 없이 연관된 직무로 부품·소재·장비에 특화된 세계최고 중소기업에 취업할 수 있으니 고용불안에 시달릴 이유가 적다. 프랜차이즈 창업이나 자영업에 눈을 돌릴 이유가 없다. 직업교육이 아니라도 시민대학을 다니면서 대학수준의 교육을 받고 학위도 취득할 수 있기 때문에 공부에 대한 아쉬움을 느낄 필요도 없다.
국회에서 표류하고 있는 추가경정예산안을 보면 생산직의 숙련과 교육이 필요하다는 고민이 담겨있다. 생산직 신입사원들이 다닐 수 있는 대학을 늘리고, 취업연계형 대학도 설립하겠다는 계획이 담겨 있다. 위기의 사업장에 있는 숙련 노동자들이 교육을 통해 역량을 업그레이드해 재취업할 수 있게 돕겠다는 계획도 있다. 생산직 교육과 숙련이라는 문제는 정부도 피할 수 없다고 인지하는 것 같다. 그러나 추경예산안의 제조업 관련 대책은 검토되지 않은 채 정국의 대치 속에 방치되고 있다.
학령인구 감소로 위기에 처한 지역 대학들의 역할 문제도 생산직의 직무교육이라는 질문과 함께 풀어볼 수 있을 것 같다. 지역의 전문대와 4년제 대학이 생산직들에게는 ‘4차산업혁명’ 시기에 필요한 공학과 자연과학 지식을 배우는 직업교육의 장이자, 인문학·사회과학 공부를 할 수 있는 배움터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생산직 직무에 대해 훨씬 더 촘촘한 표준체계와 이에 연계된 고용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평생교육 체제를 재편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생산직들이 정말로 배움에 대한 의지가 있는지, 끝없이 무언가를 배워야만 하는 사회가 옳은지에 대한 토론도 필요하다. 그러나 제조업의 전환 문제를 구호를 외치는 노동자들과 부실기업에 대한 공적자금 투입 문제로만 환원하는 데에서는 빠져나와야만 한다. 그러기에 한국 경제의 30%를 담당하는 제조업에는 풀어야 할 근본적인 숙제가 너무나 많다.
<양승훈 경남대 교수·문화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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