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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

[여적]여성과 물리학

opinionX 2018. 10. 4. 14:54

프랑스와 스위스의 국경지대에 위치한 유럽핵입자물리연구소(CERN)는 우주 생성 원리의 열쇠를 쥔 ‘힉스 입자’를 발견한 곳으로 유명하다. 세계 최대 입자물리학연구소인 이곳에선 유럽 22개국 과학자들이 공동연구를 벌이고 있다. CERN이 배출한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만 8명에 이른다.

최근 이 연구소의 명성에 걸맞지 않은 사건이 발생했다. 지난달 28일 ‘고에너지이론과 젠더’를 주제로 열린 워크숍에서 초청 강연자인 알레산드로 스트루미아 이탈리아 피사대학 교수가 성차별적 발언을 한 것이다. 영국 BBC방송 등에 따르면, 그는 “물리학은 여성에게 차별적이지 않다”며 “외려 여성 연구자들이 논문 인용횟수가 더 높은 남성 연구자들을 제치고 취업에 성공해왔다”고 주장했다. 강연에 활용한 슬라이드 자료에는 ‘물리학은 남성에 의해 발명되고 창조되었다’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CERN은 스트루미아 교수의 강연이 “매우 모욕적”이었다며 강연자료를 웹사이트에서 삭제하고, 조사가 진행되는 동안 그의 CERN 관련 활동을 정지시킨다고 발표했다.

문제의 강연 나흘 뒤, 세계 물리학계가 다시 ‘여성’ 이슈로 뒤덮였다. 여성에게 인색하기로 악명높은 노벨 물리학상이 여성인 도나 스트리클런드 캐나다 워털루대학 교수에게 돌아갔기 때문이다. 그는 마리 퀴리(1903년·프랑스)와 마리아 거트루드 메이어(1963년·미국)에 이어 역대 세 번째 여성 수상자다. 첫 수상자가 나오고 60년 만에 한 명, 다시 55년 만에 또 한 명. 스트리클런드 교수 본인도 “여성 수상자가 이보다는 더 많을 줄 알았다”며 놀라워했다고 한다. 사실 최초의 여성 수상자인 마리 퀴리도 상을 받지 못할 뻔했다. 남편 피에르 퀴리가 부인이자 동료인 마리의 역할을 강조하며 공동 수상을 요구한 끝에 가까스로 노벨상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

물리학계에서 남성이 역차별당한다고 주장한 스트루미아는 역사의 기록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김현철 인하대 물리학과 교수가 페이스북에서 스트루미아를 향해 일갈했다. “성차별이든, 인종차별이든 그 차별 속에 들어있는 역사적 맥락을 살피지 않으면, 저 사람처럼 헛소리를 할 수밖에 없게 된다.”

<김민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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