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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

[여적]오주석의 서재

opinionX 2018. 9. 7. 11:07

한국 축구가 월드컵 4강에 진출한 2002년, 오주석은 <오주석의 한국의 미 특강> 서문에 이렇게 썼다. “이제는 문화와 예술을 말할 차례다. 문화, 그것은 결국 우리가 살아가는 보람, 특히 지금 이 땅에 사는 이유, 바로 정체성의 문제다. 문화는 축구와 달리 우리 스스로 일구어야 한다. 히딩크보다 열 배의 능력을 가진 사람이 도와주어도 대한민국의 문화·예술은 한 발짝도 전진하지 못한다.”

오주석은 문화란 축구와 달라 몇몇 선수가 끌어올리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가 보기에, 문화계에 필요한 사람은 히딩크 같은 선수 조련사가 아닌 국민의 안목을 높이는 해설사였다. 오주석은 옛 그림 해설사를 자임했다. 그는 대중 강연, 잡지 기고 등을 통해 옛 그림의 아름다움을 풀어냈다. 동양고전과 시문에 밝았던 그의 그림 읽기는 남달랐다. 예를 들면 정선의 ‘금강전도’는 동양의 주역 사상으로 풀었다. 정선이 금강산 일만 이천 봉우리를 한데 묶어 하나의 원으로 만들어 <주역>의 이치를 구현했다는 것이다. 김홍도의 ‘마상청앵도’에서는 나뭇가지 없이 이파리로만 열을 지어 그린 봄철 버드나무를 주목하라며 무심코 지나쳤을 독자들을 일깨웠다. 그가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을 냈을 때 사람들은 회화예술계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가 나왔다며 반겼다. 그는 <단원 김홍도>를 통해 김홍도를 ‘가장 조선적인 화가’로 자리매김했다. 윤두서의 ‘자화상’의 내력을 밝혀내기도 했다. 그는 옛 그림을 읽어주는 미술사학자였다. 그렇다고 그림에 갇혀 있지 않았다. 그는 우리의 삶 자체가 아름다워야 한다며 문화계에 쓴소리도 아끼지 않았다.

2005년 오주석은 49세로 세상을 떴다. 10여년이 지나 아련한 기억 속에 남아있는 그를 지방자치단체가 불러냈다. 지난 5일, 그의 고향 경기 수원시 남창동에 ‘오주석의 서재’가 문을 열었다. 책 3400권을 포함해 자료·책상 등 오주석의 손때가 묻은 유품 4200여점이 전시됐다. 아래층에는 전시·교육 공간도 마련됐다. 이곳에서는 개관 특별전 ‘오주석이 사랑한 우리 그림’이 열린다. 수원 화성 행궁 옆에 위치한 ‘오주석의 서재’는 화성의 또 다른 볼거리가 될 것 같다. 사라질 뻔한 명사의 서재를 보존하고 문화공간으로 만든 수원시에 찬사를 보낸다.

<조운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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