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경향신문 자료사진

대통령 연설에 이따금 등장하는 게 있다. 한 사람씩 이어가는 호명(呼名)이다. 말하는 사람은 비장해지다 이내 목젖이 젖고, 듣는 사람도 눈시울이 붉어진다. 문재인 대통령은 호명을 가장 많이 한 대통령이다. 지난 6일 소방의날 기념식에선 인명을 구조하다 순직한 20명의 이름을 불렀다. 그 속엔 지난해 10월 독도 해역 소방헬기 추락사고 영결식에서 직접 호명했던 소방관 5명도 들어 있었다. 취임 첫해엔 광주 망월동 묘역에서 5·18 민주열사 4명(박관현·표정두·조성만·박래전)을 호명했고, 지난해 3·1운동 100주년 기념식에선 널리 알려지지 않은 여성독립운동가 6명(동풍신·윤희순·곽낙원·남지현·박차정·정정화)을 소개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2010년 천안함 희생 장병 46명의 이름을 불렀고, 박근혜 전 대통령은 2014년 세월호 사고 33일 만에 사과 연설을 하며 10명의 의인을 호명했다. 고귀한 희생을 기리고 업적을 예우하는 데 이 이상 안성맞춤인 것도 없다.

이름은 한 사람의 소중한 존재감을 상징한다. 권위·능력을 빌릴 때도 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치는 기도가 그런 예다. 요즘엔 새 출발할 맘으로 개명하는 운동선수도 곧잘 본다. 동명이인이 많은 여자 골프에선 ‘이정은6’처럼 숫자도 붙는다. 개개인의 정체성을 보여주며, 세상에 왔다 가는 흔적이 이름인 까닭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의 시 ‘꽃’에서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던 사람을 꽃으로 만들어 준 것도 그 호명이었다.

타워크레인을 몰거나 형틀목수로 일하는 20여명의 여성노동자들이 18일 마이크를 잡았다. “이모님, 아줌마 말고 이름으로 불러달라”고. 남성노동자는 이름을 부르며 여성은 높여주면 ‘여사님’, 대개는 ‘이모님’ ‘아줌마’로 통칭한다고 했다. 화장실·샤워실이 부족한 건설현장 문제도 짚으면서 무엇보다 여자라서 서럽고 차별받는 걸 호칭으로 지목한 것이다. 과거에도 급식노동자를 “밥하는 아줌마”라고 했다가 호되게 욕먹고 사과한 국회의원(이언주)이 있었고, 올해 국감장에선 공공기관 대표가 여성 의원을 “어이”라고 부른 일도 있었다. 꽃이 될 일이 많지 않은 세상, 부르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꽃이 되는 게 이름이다.

이기수 논설위원 kslee@kyunghyang.com


 

 

오피니언 여적 - 경향신문

 

news.khan.co.kr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