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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신라 혜공왕 15년 3월 경주에 지진이 있어 민옥이 무너지고 죽은 자가 100명이 넘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나온다. 지진학자들은 진도 6.0 이상 강진으로 추정하는데 2016년 진도 5.8 경주 지진보다 강력했다. 경주엔 고려·조선 시대에도 수많은 지진이 발생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일대는 양산단층과 울산단층이 지나가 한반도에서 지진 위험이 가장 높은 지역인데도 월성·고리에 원전을 14기나 지어놓았다. 경주·포항뿐 아니라 부산·울산도 지척이어서 만약 체르노빌·후쿠시마 같은 원전 사고가 나면 더 큰 재앙이 우려된다.

기술자들이 인문학에 조예가 있었더라면 지진 다발 지역에 원전을 밀집해 놓아 국민이 공포에 떠는 일은 없었을 테다. ‘내진설계 등으로 원전은 안전하다’는 일부 공학자의 기술맹신주의와 ‘경제성 분석 결과 월성1호기 조기 폐쇄가 부당했다’는 일부 경제학자나 감사원의 태도는 위험을 보지 못하는 위험맹 사회의 징후다.

저널리즘스쿨에서 정부 국책사업들을 어떻게 평가할지를 가르칠 때 세 가지 의문을 던져보라고 한다. 타당한가, 정의로운가, 민주적인가? 감사원이 경제성 분석으로 월성1호기 조기폐쇄를 부당한 것으로 봤는데 경제성보다 더 중요한 게 타당성이다. 국책사업은 경제성은 있어도 타당성에서 밀리면 사업을 추진하지 않는 게 옳다. 타당성은 한정된 예산의 투입 순서까지 고려하는 개념이다. 경제성이 있다고 강변한 4대강사업도 환경영향평가와 더불어 사업 우선순위 등 타당성을 제대로 검토했더라면 이런 재앙은 없었다. 22조원을 강에 쓸어 넣는 대신 반값 등록금이나 고교 무상교육 등을 실시할 수도 있었으리라.

정의로움의 문제는 이 시대에 노후 원전을 계속 가동하는 게 옳은가에 달려있다. 원전은 한때 ‘클린 에너지’로 각광받았으나, 사고 위험을 빼더라도 방사성 폐기물 처리비용에 사회적 갈등비용까지 급증하고 자연에너지 생산비용이 줄면서 선진국에선 탈원전 추세가 빨라지고 있다.

민주성은 정책결정 과정에서 민주주의를 어떻게 구현하느냐에 달려있다. 문재인 정부는 탈원전을 공약으로 내걸어 선거에서 이겼고 약속을 이행했다. 집권해서도 오랜 공론화 과정을 통해 점진적 탈원전으로 결론을 냈다. 국민 참여를 통한 정책 전환이었다는 점에서 숙의민주주의 신기원을 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런데 감사원은 월성1호기의 안전성과 주민수용성을 감사대상에서 빼고 경제성 분석만으로 결론을 냈다. 최재형 감사원장은 대선 득표율 41%를 언급하며 문 대통령의 말을 꼭 들을 필요가 없다고 하는가 하면 말을 안 듣는 감사국장을 교체하는 등 탈원전 정책에 적대적 태도를 보였다. 월성1호기 폐쇄는 2019년 한수원 이사회에서 11대 1로 결정됐고, 보수 변호사단체와 한수원 노조에서 고소했지만 검찰에서 무혐의 처리된 것이었다. 시민단체들은 ‘폐쇄 결정이 부당했다’는 결론에 끼워 맞추려 피조사자를 강압하는 등 직권을 남용했다며 최 원장을 고발한 상태다.

윤석열 검찰총장과 측근 검사들도 정치에 뛰어든 것 같다. 압수수색의 전격성이나 범위로 미뤄 자료 폐기를 넘어 원전 폐쇄 결정 전반을 수사할 태세다. 감사원조차 징계 요구에 그쳤는데 보수야당이 고발하자 즉각 수사에 착수했다. 털면 처벌해야 할 공무원도 나올 것이다. 문제는 수사가 가져올 엄청난 부작용이다. 민의에 기반한 정치는 실종되고 행정은 바람직한 정책방향보다 규정에 맞추는 데 골몰하게 될 것이다. 검찰이 정치와 정책을 재단하는 사태는 ‘검찰독립’이 아니라 무소불위의 ‘검찰독립국’으로 가는 길이다.

“전문관료는 정치를 하면 안 되고 행정만 하게 돼있으며 무엇보다 비당파적 자세로 행정을 해야 한다”고 일찍이 막스 베버가 강조했다. 감사원장과 검찰총장이 자기 절제를 못하고 베버가 경계한 ‘분노와 편견’에 휩싸여 일한다면 국가체제는 마비되고 만다. 탈원전을 무산시키려는 원전 이해관계자와 보수언론, 선거에서 패배한 세력에 동조해 당파적으로 행정을 한다면 민주주의는 실종될 수밖에 없다. 타당성과 시대적 정의, 민주적 행정 절차에 일대타격을 가하고 있는 세력. 그들을 내버려두면 위험맹 사회가 펼쳐진다.

이봉수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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