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층간 소음이 발생하지 않았다면 위층에 누가 사는지 여전히 모르고 있을 것이다. 아이들이 쿵쿵 뛰는 소리가 갈수록 심해져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위층으로 올라가 조심해 주시면 고맙겠다고 말했다가 그만 계단참에서 ‘전쟁’이 날 뻔했다. 예의를 갖춰 이야기를 했는데도 주인 아주머니는 목청을 높였다. 자기 집에는 어린아이가 없을뿐더러 그런 소리가 날 일이 없다는 것이었다. 씨름선수 같은 아들, 말이 엄청 빠른 딸까지 가세해 분위기가 자못 험악했다.

다른 층에서 나는 소리가 바로 위층에서 나는 것으로 들린 경우인 것 같다며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었다. 위층 사람들도 이내 핏대를 가라앉혔다. 덕분에 위층에 팔순 노모가 사시고, 주말이면 근처에 사는 손주들이 놀러 온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손주들이 찾아오는 날이면 위층 아주머니가 내려와 조금 시끄러울 수 있으니 양해해 달라고 부탁했다. 가끔 과일이 오가기 시작했다. 층간 소음이 층간 소통으로 바뀌었다.

문을 마주하고 있는 202호와는 아직 인사를 나누지 못했다. 아래층 101호에도 어떤 분들이 살고 있는지 모른다. 새삼스러웠다. 앞집이나 위 아랫집이 물리적으로는 얼마나 가까운가. 내 머리와 위층 사람들 발바닥 사이는 수직으로 채 2m가 안된다. 앞집 사람들하고는 수평으로 15m 이상 떨어져 있지 않다. 서너 가구가 반경 10m 안에 살고 있는데 서로 누가 누군지 모르고 또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이웃이 언제나 낯선 타인은 아니다. 대화를 나눌 때가 있다. 요즘은 반려동물이 이웃들 사이에 다리를 놓는다. 예전에는 어린아이가 ‘이야기 꽃’이었다. 지나가던 할아버지가 “아이고, 고 녀석 참 잘생겼다, 몇 살이에요?”라고 말을 건네면 젊은 엄마가 “엊그제 돌 지났어요”라면서 몇 마디 대화가 오간다. 요즘은 아이가 있던 자리를 반려동물이 차지한다. 여고생이 강아지 앞에 앉아 손을 내밀며 묻는다. “아유 귀여워. 너 몇 살이니?” 주인이 답한다. “9개월 됐어요.”

반려동물과 같은 대화의 작은 촉매가 갈수록 의미심장해 보인다.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저 ‘작은 끈’이 우리를 지금과 다른 미래로 이어주는 ‘동아줄’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걱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반려동물이 가족, 이웃, 타인이 있어야 할 자리를 대체하는 것은 아닌가, 그리하여 정작 사람과 사람 사이의 끈이 끊어지고 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를 씻어내기가 어렵다.

보다 심각한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사람들 사이의 대화를 사라지게 하는 ‘신종 전염병’이 있다.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이유와 방법을 외면하게 하는 값비싼 상품. 지금 우리가 손에 쥐고 있는 스마트폰이다. 다른 사람과의 대화를 잃어버리게 하는 주범이 바로 온라인 시대의 총아, 스마트폰이다.

대화 연구자이자 임상심리학자인 셰리 터클(미국 MIT 교수)은 최근에 출간한 책 <대화를 잃어버린 사람들>(황소연 옮김, 민음사)에서 스마트폰이 가정, 학교, 기업에서 대화를 추방한다고 경고한다. 온라인 접속 과잉이 오히려 면대면 대화의 결핍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부모와 자녀 사이의 대화를 가로막는 것이 스마트폰이다. 교사와 학생 사이의 상담 역시 스마트폰이 막고 있다. 일터에서도 스마트폰이 회의다운 회의를 불가능하게 한다. 가족은 물론 연인과 친구, 직장 동료와 선후배 사이의 대화가 e메일이나 문자로 대체되고 말았다.

터클 교수는 온라인이 ‘우정을 요구하지 않는 교제’라는 환상을 제시했으며 프로그램이 날로 정교해지면서 ‘친밀감을 요구하지 않는 우정’이라는 환상을 강화한다고 말한다. 인간관계에서 감정이 급격하게 배제되고 있는 것이다. 면대면 상황은 교감을 요구한다. 상대방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대화가 이뤄지지 않는다. 하지만 온라인상에서 감정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난다. 동일시나 감정이입이 개입할 여지가 줄어든다. 터클 교수는 이를 ‘마찰 제로’ 상태라고 말한다. 기업의 해고 통보나 연인의 결별 선언이 문자로 이뤄지는 것도 심리적 마찰을 피하고 싶기 때문이다.  

디지털 원주민은 대화가 낯설고 불편한 세대다. 반경 10m 이내에 살면서도 서로 알려고 하지 않는 아파트 주민도 최초의 인류이지만 타인과 대화하기를 어려워하는 세대 또한 신인류다. 타인이 없는 미증유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타인과의 관계가 사라지면 사회적 결속력만 무너지는 것이 아니다. 결국 자기 자신과도 대면하지 못한다. 대화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공감대와 소속감, 창의력, 성취감이 모두 떨어진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대화를 되찾아야 하는 보다 다급한 이유가 있다. 우리는 지금 두 개의 특이점을 맞이하고 있다. 지구 온도 상승과 인공지능(AI). 특이점은 우리가 일찍이 경험하지 못했으며 또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미래가 개막되는 시점이다. 재난이 일상생활 안으로 한 발 들여놓고 있다. 과학기술의 눈부신 도약에도 불확실성이 내재되어 있다. 우리가 ‘대화의 힘’을 재발견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특이점의 발생과 함께 공멸할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이웃이다. 사회안전망이다.

잠시 스마트폰을 끄고 자문해보자. 나는 누구와 얼굴을 맞대고 대화하는가. 그런 상대가 몇 명이나 있는가. 현관문을 열 때도 물어보자. 우리 이웃은 누구인가, 어디에 있는가.

<이문재 | 시인·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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