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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서로 만나 결혼한 것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운이 좋은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만약 25년 뒤에 헤어질 것을 알았더라도 우린 결혼했을 것이다. 우리는 부부로서 함께 멋진 삶을 살았으며 부모로서, 친구로서, 벤처 프로젝트 파트너로서, 모험을 추구하는 개인으로서 앞으로 멋진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비록 (우리를 표현하는) 단어는 달라지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가족이며 소중한 친구관계를 유지할 것이다.”

아마존 최고경영자(CEO)인 제프 베이조스 부부의 이혼 발표는 이랬다. 세상에 이렇게 ‘쿨’한 이혼 선언이라니. 3만4000명이 ‘좋아요’를 눌렀다.

세계 최대 전자상거래업체 아마존 최고경영자(CEO)인 제프 베이조스와 부인 매켄지 베이조스가 지난해 캘리포니아주 베벌리힐스에서 열린 한 행사에 참석해 나란히 포즈를 취한 모습. 세계 최고 부호인 베이조스가 9일(현지시간) 트위터를 통해 결혼 25년 만에 이혼을 선언해 부인과의 재산분할이 어떻게 될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세상에 쉬운 이혼은 없다. 베이조스 부부도 상상하지 못할 고통을 겪었을 것이다. 일부 언론은 베이조스의 불륜설을 제기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쿨’한 발표를 한 데 대해 혹자는 말한다. 결국은 돈 아니겠느냐고. 아내 매켄지가 받을 수 있는 위자료로 70조원 얘기가 나온다. 천문학적인 돈을 가지면 친권과 양육권, 상대에 대한 감정적 앙금 등이 모두 치유될까.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과 임우재 전 삼성전기 고문은 치열하게 법정 다툼 중이다. 최태원 SK 회장과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도 이혼소송 중이다. 70조원까지는 안되겠지만 이들의 위자료도 50억~80억원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일반인이면 평생 먹고살 만한 돈이다. 돈이 있다고 모두가 ‘쿨’한 이별을 하는 것은 아니다.

비단 부부 사이뿐일까. 심지어 직장도 그렇다. 20년 근무하고 나가면서 회사와 얼굴을 붉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화려하게 영입됐지만 뒤도 안 돌아보고 그만두는 경우도 많다. 기업 간 전략적 제휴도 끝이 아름다운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북유럽은 좀 다른 것 같다. 이혼도 우리보다는 일반적이고 해직도 쉬워 보인다. 북유럽 사람들이 특별히 마무리를 잘하는 성향이라서 그럴까? 그보다는 제도를 주목한다. 북유럽은 계약관계가 촘촘해 책임소재가 명확하고 복지가 잘 마련돼 있어 새로운 선택에 부담이 없다. ‘결혼’이라는 제도가 어렵다고 ‘동거’를 선택하는 그들이다. 상대와 헤어진다고 생활이 궁핍해지는 것도 아니다. 아동·육아수당을 받으면 부담 없이 아이를 키울 수 있다. 직장도 마찬가지. 취업과 실직은 명시된 계약서를 따르고 설혹 직장을 잃어도 실업급여가 충분해 다음을 준비할 수 있다.

심리적인 요소도 있다. 혜민 스님은 <고요할수록 밝아지는 것들>이라는 책에서 “연애가 깨질 때 우아하게 헤어지는 사람은 없다”며 “나란 인간도 엄청 치사하구나, 아주 못됐구나를 깨달아야 다른 완벽하지 못한 사람을 봤을 때 쉽게 손가락질하지 않게 된다”고 썼다. 부족한 나와 그동안 살아줘서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면 생각보다 ‘쿨’한 이별을 할 수 있다. 부족한 나를 20년간 써줘서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면 회사와도 우아한 이별이 가능할지 모른다.

인사철이다. 신문 한쪽에는 승진자 명단이 가득하다. 그들에게는 수많은 축하 인사가 쏟아지겠지만 그 자리를 지켰던 선임자의 얘기는 없다. 승진자 명단에도, 부서이동자 명단에도 없다면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따로 연락을 취해볼까 생각하다가도 행여 실례가 될까 싶어 망설여진다. 회사랑 ‘아름다운 이별’을 못했을까봐 그의 주변 동료들에게 묻기도 조심스럽다. 사라진 그들이 머지않은 내 모습이라고 생각하면 가슴 한편이 묵직해진다.

‘이 회사에서 함께한 시간들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운이 좋았던 일이라 생각한다. 저는 나가지만 여러분은 여전히 나의 가족이다. 소중한 관계를 이어가자.’ 나는, 당신은 떠날 때 ‘쿨’한 퇴직 인사를 남길 수 있을까. 헤어짐에도 기술이 필요할 텐데 어디서도 배운 적 없다. 그래서일까, 헤어짐은 여전히 낯설다. 우아한 이별은 더더욱.

<박병률 경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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