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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9월 경북 구미 불산사고 이후로 크고 작은 위험물 사고가 연달아 발생했다. 매번 위험물 사고가 나면 위험물질을 관리 감독하는 기관과 사고에 대응하는 소방과의 이원화가 문제점으로 대두되었다. 예를 들면, 위험물안전관리법은 국민안전처, 화학물질관리법은 환경부, 고압가스 안전관리법은 산업통상자원부, 산업안전보건법은 고용노동부, 총포. 도검 및 화약류 단속법은 경찰청, 농약관리법은 농림부, 원자력안전법은 원자력안전위원회 등 부처별 개별법에 의한 분산관리로 위험물 사고가 발생했을 경우 소방의 입장에서 보면 정확한 데이터에 근거한 효과적인 대응에 어려움이 많은 것이 현실이다.

이런 문제점에 대한 해결책을 논의하고자 2013년 3월 국회에서는 ‘화학사고 대응 체계의 입법. 정책적 개선 방안’이란 세미나를 마련했다. 세미나에서는 환경부, 학계, 기업체, 국회사무처, 당시 소방방재청이 자신들만의 논리를 내세우느라 바빠서 정작 사고대응의 최전방에 서 있는 소방관들의 안전과 보건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논의되지 않았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유통되고 있는 위험물질은 약 24만6000여종으로 알려져 있다. 대한민국에는 약 4민1000여종의 위험물질이 유통되고 있으며, 매년 약 400여종의 신규 위험물질이 들어온다고 한다.

위험물질은 우리 실생활과 아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안전하게 사용하면 여러모로 활용가치가 높지만, 위험물질의 생산, 운송, 사용, 보관 및 폐기에 이르는 라이프 사이클 중에서 어느 한 부분이라도 소홀히 한다면 그 피해는 짐작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른다.

하루에도 수도 없이 도로 위를 질주하는 LPG 차량, 주유소 차량, 각종 위험물질 운송 차량, 심지어는 미사일을 운송하는 군용 차량 등을 목격한다.

우리나라의 위험물안전관리법에서는 위험물을 인화성 또는 발화성 등의 성질을 가지는 것으로서 대통령령이 정하는 물품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 위험물을 다시 6가지 종류(6류)로 세분해서 관리하고 있다. 참고로, 미국과 유엔(UN)에서는 위험물을 9가지 종류(9류)로 보다 더 세분화해서 관리하고 있으며, 위험물도 ‘유출되었을 때 사람, 동물, 환경 그리고 재산에 피해를 줄 수 있는 기체, 액체 또는 고체’로 폭 넓게 정의 내리고 있다.

미국 소방대원들이 위험물질 대응사고 훈련을 받고 있다.


2012년 한국교통연구원에서 발표한 ‘위험물질 운송관리 시스템 구축을 위한 실태분석 및 제도정비 방안’ 자료를 살펴보면, 위험물질 관련사고의 약 45%가 위험물질을 운송하는 과정에서 발생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이것은 특정 소방서 관내에 위험물 관련 시설, 즉 원자력발전소나 산업단지 시설이 없다고 해서 안심할 사안은 아니라는 거다. 위험물질을 운송하는 과정에서 우리나라 어디서든지 사고가 발생할 수 있다고 해석해야 옳다.

위험물 사고에 보다 전문적이고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 2013년 9월 중앙119구조본부 특수사고대응단 직제가 신설되고, 같은 해 12월 구미 119화학구조센터를 필두로 2014년 1월 서산, 시흥, 여수, 울산, 익산 6개 지역에 화학구조센터가 차례로 문을 열었다. 하지만, 앞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위험물 사고는 화학구조대만의 특화된 업무가 아닌 모든 소방관들의 업무다.

위험물질은 한번 유출되면 그 피해가 심각하며, 어떤 위험물은 유출되어도 색으로나 냄새로도 구분할 수 없기 때문에, 현장에 출동하는 소방관의 안전과 보건이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현장 소방관을 위한 안전과 보건장비, 구체적인 안전지침과 대응전략이 필요한 이유다.

미국에서는 위험물 사고에 출동하는 출동대원을 5가지 단계(Awareness, Operations, Technician, Incident Commander, HAZMAT Officer)로 분류해서 각 단계별로 수행해야 하는 업무를 상세하게 나열함으로써 현장에 출동한 소방대원의 안전을 고려하며 위험물 사고 처리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있다.

갈수록 대형화, 복잡화되어가는 현대사회의 구조적 문제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형태의 위험물 사고들, 거기에 테러와 같이 예측할 수 없는 재난에 초동 대응해야 하는 소방의 자세를 몇 가지 짚어보고자 한다.

이건_ 주한 미공군 오산기지 선임소방검열관


우선은, 위험물 사고의 특성과 실질적인 현장 대응방안을 교육시킬 수 있는 유능한 교수요원의 양성이 절실하다. 모든 소방관이 화학자가 될 필요는 없다. 강의실에서 단순히 화학식만을 나열하는 것으로는 현장에서 그리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측 가능한 다양한 시나리오별 훈련 프로그램이다. 훈련을 통해서 위험물질의 특성을 파악하고, 어떻게 현장을 지휘하고 통제해야 하는지, 현장에서 어느 정도의 안전조치가 선행되어야 하는지 등 보다 현장 중심의 교육과 훈련이 필요하지만, 이것을 강의할 인력이 턱없이 부족한 것이다.

향후 유능한 교수요원을 양성하기 위해서는 필요하다면 해외 파견교육을 통해서 다양한 사고사례를 수집하고, 현지 소방대원들의 안전장비 활용도를 조사하며, 훈련시설과 실질적인 훈련프로그램에 대한 벤치마킹도 병행해서 진행할 수 있다.

최근 경기도소방학교는 미국의 한 유명한 소방훈련업체와 합작으로 다양한 위험물 사고에 대응하기 위한 훈련시설을 건립했다. 하지만, 하드웨어적 벤치마킹에서 벗어나 그 시설을 우리의 실정에 맞게 소프트웨어적으로 개발해야 하는 것은 여전히 남아있는 숙제다.

두 번째로, 현장지휘관부터 위험물질 초동대응에 대한 교육과 훈련이 선행되어야 한다. 현장지휘관은 모든 재난현장의 총괄 책임자다. 현장지휘관은 소방관의 자격, 보유 장비, 훈련정도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해서 현장에 투입해야 하는 아주 중요한 위치에 서 있는 사람이다. 위험물 사고와 같이 변화무쌍하고, 작은 실수도 현장 소방관들의 안전과 보건에 직접적으로 피해를 줄 수 있는 만큼 현장지휘관들부터 깊이 있는 교육과 강도 높은 훈련이 이루어져야 한다.

세 번째로, 소방학교에서는 신임소방관 교육과정에서부터 위험물질의 기본이해와 초동대응에 관한 커리큘럼을 추가해서 교육해야 하고, 점진적으로 교육대상을 확대해 나갈 필요가 있다. 고작해야 1년에 2회, 그것도 한 회당 40여명이 참여하는 현재의 교육만으로는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참고로, 미국 소방대원들은 신임자 기본교육을 받을 때부터 반드시 위험물 인식과정(HAZMAT Awareness)과 위험물 운영과정(HAZMAT Operations)의 자격을 취득하도록 명시하고 있다.

위험물 사고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모든 소방관의 전문성을 높여서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 왜냐하면, 공무원의 특성상 순환보직을 통해 내근업무를 하다가도 언제든지 외근으로 발령이 나면 바로 그날이 위험물 사고를 위해 출동하는 날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네 번째로, ‘유해물질 비상대응 핸드북(Emergency Response Guidebook)’을 철저하게 숙지하고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Emergency Response Guidebook은 1973년 미 교통국에서 처음으로 발간한 책자로 위험물 사고가 발생했을 경우 초기 30분 동안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약 170여 가지의 대응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소방차 1대당 1권씩 비치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으며, 이 책자는 이미 미국, 캐나다, 멕시코, 아르헨티나, 브라질, 콜롬비아 등 북미에서 널리 활용되고 있다.

이 책자를 2012년 환경부와 당시 중앙119구조단이 ‘유해물질 비상대응 핸드북’ 이란 이름으로 번역해서 일선에 배포했지만, 필자가 일선 소방관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의에서 질문을 해보면 의외로 책자를 활용하는 방법에 대해서 모르고 있는 소방관들이 많다. 소방관 자신들의 안전과 보건을 위해서 따로 시간을 내서라도 반드시 사용법을 숙달해야 할 것이다.

다섯 번째로, 위험물 사고에 대응하는 전문화된 장비가 더 많이 필요하다. 국내에 보급된 화학보호복의 경우에는 이미 사용연한을 넘긴 것들이 많다고 보고되고 있다. 화학보호복 이외에도 제독차, 생화학차, 누출방지장비, 각종 측정 장비, 제독장비 등도 필요하다. 지자체 예산이 허용되고, 원전시설이나 산업단지 시설 인근에 위치한 소방서는 그나마 장비보유상태가 양호하다고 하나, 기타지역에서는 장비가 아예 갖추어져 있지 않거나, 있다고 해도 관리가 잘 안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특히 각종 측정 장비의 경우 센서 교체주기(보통 2년)를 넘기는 경우가 많아서, 기기의 성능자체도 의심스럽기만 하다.

마지막으로, 위험물 전문가 인력풀을 구성해야 한다. 각종 사고사례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고 함께 머리를 맞대고 연구할 수 있는 전문가들의 모임이 필요하다. 부처별 이기주의나 관피아, 학피아와 같은 어리석은 집착에서 벗어나 대한민국의 안전을 위해 순수하게 봉사할 수 있는 역량 있는 전문가들의 참여를 유도해야 한다. 문제는 누가 이것을 어떠한 방식으로 한데 아우를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야기를 정리하면서, 여러 가지 재난 중에서도 특히 위험물 사고는 정확한 데이터에 근거한 효과적인 대응이 필요하다. 위험물 사고는 단순히 신속, 열심 또는 열정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대단히 어려운 과제다.

우수한 교수요원 양성, 실질적인 교육과 훈련프로그램 개발, 다양한 위험물 훈련시설 확보, 전문장비 보유, 유관기관 및 전문가들과의 정보공유 및 유기적인 협조체계 구축 등이 선행되어야 한다. 누구나 파악하고 있는 문제들이지만, 앞으로도 이런 문제점을 계속 방치한다면 그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다.


이 건 | 주한 미공군 오산기지 선임소방검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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