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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 간다. 나무를 보다가 나무 너머가, 꽃을 보다가 꽃 너머가 궁금해졌다. 나무를 보는 시선은 나무에서 끝나지 않고 자꾸 옆으로 번진다. 옆에는 나무나 풀을 받쳐주는 것들이 있다. 무정한 바위와 돌들이다. 풀이나 나무처럼 단독자로서 하나하나 제 이름을 갖추지 못했기에 더욱 마음이 간다. 돌은 시간이 압축된 증명사진들 같다.
안동의 암산은 이름이 암시하는 대로 바위가 많을 줄 알았는데 소나무가 더 많았다. 안동답게 훤훤장부 같은 훤칠한 소나무일 줄로 기대했건만 그저 빼빼마른 이웃집 아저씨 같았다. 보고 믿는다 하지만, 본다는 것만큼 위험하고 불안한 감각도 없다. 그저 겉만 보고, 앞만 보고, 일부를 잠깐 볼 수 있을 뿐이다. 두 개나 달려 있긴 하지만 눈이란 본디 그렇게 생겨 먹었다. 보이지 않는다고 바위가 없는 건 아니었다. 한 사면을 돌아드니 암산이 보유한 내부가 그 위용을 보여주었다. 슬쩍 드러난 돌의 이마에 이 계절을 밝히는 바위솔이 우렁우렁 달려 있다. 다시 능선으로 올라서서 길가에 우뚝 선 소나무를 바라보았다. 마침 바로 곁에 무덤이 있는 곳이었다. 이른바 묘전수(墓前樹)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저 소나무에 대해 생각해 본다. 나무가 이 바닥에서 저 공중까지 걸어간 높이는 측량할 수 있지만 그 깊이는 도무지 헤아릴 수 없는 것. 나무는 여기에서 하늘을 받들고 바람을 다스리며 이제껏 자라나고 견디었다. 뿌리 박은 이후, 기웃거리지도 두리번거리지도 아니한 소나무. 나무는 저의 익은 생각을 전해주듯 가장 깊은 곳에서 비늘 한 조각을 떨어뜨린다. 그중의 어느 하나는 코흘리개 어린아이의 모습을 분명하게 닮았다.
나무 아래 나무의 그림자와 햇볕이 잘 어울렸다. “아랫방은 그래도 해가 든다. 아침결에 책보만 한 해가 들었다가 오후에 손수건만 해지면서 나가 버린다.” 문득 떠오르는 소설 <날개>의 한 대목. 혹 이상(李箱)은 ‘조문도석사가의’라는 논어의 한 대목을 떠올리며 저 구절을 구사하지 않았을까. 점점 무채색으로 변해가는 바닥에 손바닥만 한 햇살이 어른거린다. 무량한 기분으로 얼굴을 쓰다듬으면, 암산이 바위를 숨기고 있듯 두툼한 살집 아래 딱딱한 뼈들이 만져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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