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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제주인권회의에서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소장이 고민 하나를 털어놓았다. “촛불집회를 한 이후에도 시민들이 시민단체에 참여하지 않습니다. 시민들은 시민단체 회원으로 가입하지 않고, 시민단체를 후원하지도 않아요. 활동가는 더 이상 충원되지 않아 늙어가고 있습니다.” 이건 시민운동 차원을 넘어 한국 사회가 당면한 근본 문제다. 한국 사회에 시민이 없다.

지난해 겨울 광장의 시민을 생각하면 시민의 부재는 역설적이다. 시민단체 활동이 시민성을 판단할 유일한 척도는 아니지만, 광장을 떠난 시민이 연대하기보다 고립된 개인으로 돌아간 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개인과 국가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다. 향우회, 동문회, 친목회만 번성한다. 시민이 떠난 빈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들은 전문가다. 정부가 신고리 원전 5·6호기 폐쇄 여부를 시민에게 맡긴다고 발표하자 여기저기서 전문가를 찾는다. 탈원전 문제는 보통 시민이 알 수 없으므로 전문가에게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중요한 문제일수록 전문가에게 의존하는 현상은 그들이 더 올바른 결정을 할 것이라는 믿음에 근거한다. 과연 그럴까? 스콧 암스트롱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교수는 최소한의 지식 수준을 넘기만 하면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차이는 사라진다고 했다. 미국 저널 ‘위험 분석(Risk Analysis)’에 게재된 논문 4편을 받아보았다. 4편 모두 위험 인식, 위험 판단에서 전문가와 일반인의 차이가 없다는 결론을 냈다. 한 논문은 이렇게 요약했다. “전문가의 위험 판단은 일반인보다 정확한가? 그 대답은 모른다는 것이다.” 

보통 주요 정책은 여러 문제로 얽혀 있다. 도구적 지식뿐 아니라 도덕적 판단도 요구한다. 게다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결단해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민주주의 이론가 로버트 달은 이런 사례를 제시했다. 전쟁을 영원히 피할 수 있지만, 대신 사람들이 거의 모두 죽는 A라는 선택, 그리고 전쟁을 피할 가능성이 적지만 인구의 4분의 1이 사망하는 B라는 선택. 여기서 전문가만이 내놓을 수 있는 해법이란 없다. 탈원전 문제도 다르지 않다. 경제적 이익과 불안을 동시에 가져다주는 원전 증설, 경제적 손실은 있지만 안전과 지역갈등 해소를 보장하는 탈원전 사이에 전문가의 기술적 식견은 별 쓸모가 없다.

게다가 전문가주의는 민주주의와 배치된다. 민주주의는 자기 통치 원리에 기반을 둔다. 구속력 있는 집단적 결정은 그 대상이 되는 사람들에 의해서만 내려져야 한다. 자신의 행동을 남이 규제하면 그건 독재다. 시민들이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함으로써 그 권리와 책임을 나눠 갖는 경험은 시민적 성찰로 이끈다.

우리가 다시 시민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다행히 비관적 현실을 거론했던 박래군 소장이 희망의 근거를 제시했다. 시민 활동에서 진화의 조짐을 느낀다고 했다. 자발적인 세월호 관련 모임이 10여개에 이르고, 세월호 피해자의 활동 방향이 생명·안전 사회로 한 차원 발전하고 있다고 한다. 사실 사회개혁에 대한 높은 지지, SNS에서 감지되는 변화 욕구는 보이지 않는 시민의 존재를 증명한다. 종북몰이, 색깔론이 먹히지 않는 현상을 통해서도 보이지 않는 시민을 느낄 수 있다. 어딘가 불씨가 살아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여전히 수동적이다.

개헌 문제도 마찬가지다. 정치인과 전문가는 조만간 개헌안을 선물처럼 시민 앞에 풀어놓을 것이다. 헌법은 시민의 권리장전이자 공동체의 최고 규범이다. 당연히 헌법을 만들고 바꾸는 주체는 시민이다. 그렇다면 개헌 논의는 헌법을 살아 있는 가치로 체화하고, 심의와 숙고를 통해 시민임을 자각하고 시민으로 성숙해지는 과정이어야 한다.

시민은 공공의 일에 참여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왜 지역·직장·학교에서, 동네 문제·사회적 쟁점을 두고 토론하고 설득하며 서로 배우는 기회를 가지면 안되는가? 시민들은 토론하는 과정에서 기존 관념을 깨뜨리고 새로운 생각을 할 수 있다. 전문가의 질문에 답하는 여론조사 응답자, 선거 때 주어진 선택지에서 하나를 고르는 일이 시민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는 아니다. ‘보이지 않는 시민’을 벗어던지자. 전문가가 시민을 대신하게 놔두지 말자. 우리는 촛불시민이었다.

원전을 핵공학자·원자력 업계에, 헌법을 법률가·학자에게만 맡길 수 없다면 우리는 의문을 품어야 한다. 전쟁과 안보를 장성들에게, 검찰을 검사들에게만 맡길 수 없다면 우리는 물어야 한다. 왜 여기에 시민은 없는가? 뤼크 베송의 영화 <루시>의 마지막 장면에서 루시는 최종 진화 단계에 이르자 사라진다. 누군가 묻는다. “어디에 있는가?” 루시가 말한다. “나는 모든 곳에 있다.”

이대근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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