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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을 감싸던 신성(神聖)이 벗겨졌다. 그동안 문 대통령은 촛불정신을 계승한 지도자라는, 특수한 정치적 지위를 누렸다. 촛불과제의 실현이라는 신성한 사명을 띤 문 대통령과 정부는 시민들이 응원하고 지켜줘야 할 그 무엇이었다. 그 사명은 웬만한 잘못에도 비판하기보다 격려해줘야 할 만큼 중한 것이었다. 이런 마음가짐은 무능하고 부패한 기득권이 아닌, 시민 뜻을 진정으로 떠받드는 정부가 탄생했다는 벅찬 감동의 발로였다. 햇수로 집권 두 해째를 마감하는 지금, 신성의 아우라가 사라지고 있다.

대통령은 중요한 문제에서 실수를 반복했다. 정부는 오락가락하며 중심을 잃더니, 최저임금과 탄력근로제 확대 혼선 끝에 내년 경제정책 방향 수정으로 한 해를 마무리했다. 핵심은 재벌 민원을 들어주더라도 경제 활력을 자극하겠다는 것이다. 그러자 한쪽에서는 재벌개혁은커녕 재벌 중심 성장론으로 후퇴했다고, 다른 쪽에서는 섣부른 개혁으로 경제를 흔들어 놓은 사실이 확인됐다고 각각 다른 이유로 비판을 했다. 정책 기조에 변함없다고 하지만 기조를 지킬 자신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단기 경제 사정이 나빠도 견고한 중장기 경제구조 개혁을 착실히 실행할 것이라는 믿음을 줬다면 어땠을까? 이왕 정부를 응원하기로 한 이상 시민들은 당장 불만스러워도 정부를 믿고 기다려야 한다는 자신의 믿음을 정당화할 이유를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부는 이 집 저 집 불 끄러 다니는 소방차처럼 분주하기만 했다. 이런 정부를 믿고 차분히 기다리기는 어려운 일이다. 정부에 대한 신뢰는 그렇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민주당은 기득권자처럼 행동했다. 야 3당이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을 요구했을 때 변명을 하며 소극적 태도로 일관했다. 시민들은 항상 정치개혁 주체로 나섰던 민주당이 집권 이후 정치개혁 대상으로 전락하는 과정을 지켜봐야 했다. 청와대는 민간인 사찰 의혹에 휩싸였다. 문재인 정부가 과거 정부와 달라야 한다면, 그것은 무오류가 아니라, 오류를 대하는 태도여야 한다. 문재인 정부는 이 점에서 특별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집권세력은 야당, 노동계, 지식인사회, 언론 가릴 것 없이 호통치고 가르친다.

미꾸라지, DNA, 불순물이니 하는 청와대 어법은, 청와대는 그 순정성으로 인해 무얼하든 스스로 정당화된다는 자기 확신에 차 있음을 드러냈다. 현실과 괴리가 있다. 청와대가 국정을 주도하고, 야당과의 협치 없이 대통령이 국민과 직접 소통하는 ‘문재인 모델’이 실패했다. 국정 지지보다 비판이 많아져서 하는 말이 아니다. 지지율 급락의 비용을 치르면서 해낸 것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이 쓴 <청와대 정부>는 문재인 시대의 유행어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권력 집중은 결코 촛불정신과 부합하지 않는다. 가장 심각한 것은 이런 현실에도 문 대통령이 순수성과 선의에 의지해 계속 홀로 갈 것이라는 불길한 전망이다.

문재인 모델을 다른 말로 번역하면, 국정 협력자를 늘리는 게 아니라 줄이고, 반대세력을 위축시키는 게 아니라 키우고, 그로 인해 고립을 자초하는 국정 운영 방식이다. 문 대통령은 취임 직후 봉하마을을 찾아 성공한 대통령이 되어 돌아오겠다고 다짐했다. 그건 역대 대통령의 실망스러운 결과를 지켜본 시민들이 간절히 바라던 바이기도 했다. 성공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을 다 해야 한다. 개각도 해봤다. 정책실장, 경제부총리도 교체해봤다. 정책 수정도 해봤다. 그래도 시민과 시장의 신뢰를 회복하지 못했다. 청와대를 개편해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사람이 바뀌지 않는 한 다 소용없는 일이다. 지금까지의 신호는 모두 하나를 향하고 있다. 문 대통령의 변화다.

성공을 하려면 대통령이 바뀌어야 한다. 국정의 중심을 청와대에서 행정부·민주당으로, 소수파 정부를 야당이 참여하는 다수파 연합으로 전환해야 한다. 그러면 타협할 것은 하되, 안정적이고도 지속적인 개혁을 할 수 있다. 이건 무슨 비법도 아니다. 여소야대 정부로서 피할 수 없는 선택이다. 문 대통령은 취임식을 마치고 야당을 찾아 “5년 내내 이렇게 야당과 늘 대화하고, 소통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바른정당의 주호영 원내대표는 박근혜 정부를 반면교사로 삼아 여당과 소통만 잘해도 성공한다고 응대했다. 문 대통령은 시민사회, 야당은 물론 민주당 지도부와도 거의 만나지 않는다. 요즘 촛불의 꿈은 아득하고, 집권세력은 촛불이라는 껍데기를 짊어지고 가는 달팽이처럼 보인다. 문 대통령이 민주당 중진과 만나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자리를 가져보면 어떨까?

<이대근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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