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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전까지 미적거렸다. 말머리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가닥이 잡히지 않았다. 대상은 불특정다수. 상투적이어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너무 예외적이어도 안 되었다. 특강이나 연설이 아니다. 결혼식 주례사 얘기다. 피치 못할 사정을 내세우며 거절하곤 했는데 이번에는 경우가 달랐다.

농사를 지으며 시를 쓰는 친구가 딸을 결혼시킨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친구의 외동딸이 내가 몸담고 있는 대학, 그것도 내가 나온 학과를 졸업했으니 더 이상 손사래를 칠 수가 없었다. 두 달 전, ‘농부시인’은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4월28일, 토요일 오후 2시. 경기도 화성.”

50대로 접어들면서 가끔 주례를 서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대부분 제자들이어서 그냥 돌려보내기가 쉽지 않다. 그러마 하고 나서 날짜가 다가오면 끙끙댄다. 처음 한두 번은 수월했다. 나의 결혼생활에 대한 반성을 한 다음, 연애와 결혼의 엄연한 차이를 설명하고 이어 신랑신부의 이력과 앞으로의 포부를 소개하면서 마지막으로 귀감이 될 만한 시나 잠언을 인용하곤 했다.

어디서나 매너리즘이 문제다. 서너 번이 지나자 이른바 콘텐츠가 바닥났다. 창작의 최대 금기인 동어반복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신랑신부가 매번 다르고 하객들 또한 다들 처음이니 망정이지 누가 나를 따라다니며 녹취를 했다면 ‘동어반복과 자기표절의 대가’라고 낙인찍었을 것이다. 저런 자각증세가 나타난 이후 주례를 서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간 우리의 농부시인한테 얻어 마신 술이 몇 동이며, 가을마다 보내오는 햅쌀이 또 몇 가마였던가. 평생 한 번밖에 없는 친구의 부탁이자 이제 막 새로운 세계로 접어드는 대학 후배의 청인데 날짜는 다가오고 그럴듯한 아이디어는 떠오르지 않았다. 하루 전인 4월27일 아침까지 막막했다. 주례사가 문학의 한 장르처럼 다가왔다. 이러다가 절필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다 들 정도였다.

주례사에 대한 압박감을 떨쳐버리기 위해 텔레비전을 켰다. 2018년 4월27일, 오늘이 어떤 날인가. 판문점에서 남북 정상이 만나는 그야말로 역사적인 날이 아닌가. 생중계 화면 앞에서 나는 ‘내일의 주례’가 아니었다. 분단국가의 국민이었으며 한반도의 한 구성원이었다. 나는 실향민의 아들이자, 전쟁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평화주의자이자 세계인이었다. 군사분계선에서 남북 두 정상이 손을 맞잡은 순간 이후 벌어진 일련의 충격과 환호는 굳이 재론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기념식수 장면을 지켜보다가 몇 시간 전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백두와 한라의 흙, 한강과 대동강의 물이 하나가 되는 순간 무릎을 쳤다. 합토제, 합수제. 저것이야말로 결혼의 메타포였다. 서로 다른 땅과 물이 만나 새로운 나무를 키워내는 것이 결혼 아닌가. 연애는 개인과 개인의 만남이지만 결혼은 두 집안, 두 문화의 결합이다. 연애는 국가가 간섭하지 않지만 결혼에는 국가가 개입한다. 그래서 결혼이 훨씬 더 어려운 것이다.

도보다리 대화도 내게는 결혼의 한 과정으로 보였다. 날짜를 잡기까지 얼마나 많은 난관이 도사리고 있는가. 양가의 가치 기준과 요구사항이 끊임없이 충돌한다. 서로 타협하고 화해하는 과정을 거쳐야 이윽고 결혼식 날짜가 정해진다. 예비부부는 양가의 의견을 조정하는 동시에 ‘둘만의 약속’을 해야 한다. 나는 이런 남편이 되겠다, 이런 아내가 되겠다, 양가 부모와 친지, 이웃과 잘 지내자 등등 둘만의 미래를 하나하나 설계해놔야 한다. 나는 주례사를 쓰기 시작했다.

남북정상회담을 어떻게 결혼식 차원으로 끌어내릴 수 있느냐는 반문이 있을 수 있다.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거대담론이 탁상공론으로 끝나는 이유 중 하나가 ‘큰 이야기’들이 개개인의 내면으로 스며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남북문제도 다르지 않다. 화해의 목표와 과정이 한반도 구성원의 구체적 생활 차원에서 논의돼야 한다. 인류와 지구 생태계의 지속가능성을 우선하지 않는 엘리트들이 내놓는 해결책은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더 큰 문제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이튿날 날씨는 쾌청했다. 30분 일찍 식장에 도착했는데, 난감한 상황이 펼쳐졌다. 야외결혼식이었다. 말솜씨도 없는 데다 목소리까지 좋지 않아 실내도 만만치 않은데 노천이라니. 나는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주문을 중얼거린 다음 주례사를 읽어 내려갔다. “결혼식 날짜 참 잘 잡았지요?” 반응이 없었다. 판문점을 환기시켰더니 고개를 끄덕거리기 시작했다. “이번 남북정상회담의 슬로건이 뭔지 아십니까? ‘평화, 새로운 시작’입니다. 결혼도 마찬가지입니다. 평화의 시작입니다.” 하객들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나는 준비한 주례사를 끝까지 읽었다.

나는 주례사에서 황금률을 자주 거론한다. ‘내가 대접받기를 원하는 것처럼 상대방을 대접하라.’ 인류의 스승들이 남긴 오랜 지혜다. 어디 부부뿐이랴. 인간관계를 포함해 조직, 기관, 국가 간에도 필수적이다. 인류와 천지자연 사이에도 적용돼야 할 핵심 덕목이 황금률이다. 판문점선언이 평화협정으로 이어지고 한반도가 인류 평화의 발상지로 거듭나려면 넘어야 할 장벽이 한둘이 아니다. 그때마다 서로 상대방의 입장이 될 수 있다면 장벽에다 문을 낼 수 있을 것이다. 높은 장벽에 내는 문일수록 문의 역할은 커진다. 이것은 동어반복이 아니라 강조다.

<이문재 | 시인·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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