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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 곳곳에서 하얗게 피어난 꽃들이 눈길을 잡는다. 이팝나무이다. 나무 한가득 흰 꽃들을 품어내는 이팝나무는 언제나 풍성하고 아름답지만 올해 유난하다. 그러고 보니 꽃들이 피기 시작한 것도 꽤 여러 날이 지났건만 지금도 싱그러움은 여전하다.

나무 한가득 꽃들을 피워내 마음을 흔들었던 벚꽃의 시간들이 순식간에 지나가 버렸지만 이팝나무는 풍성함 못지않게, 순결함이 증폭되어 이렇게 우리 곁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한번 눈길을 잡아 마음까지 열고 나니 곳곳에 이팝나무가 지천이다. 이렇게나 이팝나무가 곳곳에 많았던가! 이렇게나 꽃들이 대단하였던가!

이팝나무는 늦은 봄, 꽃송이가 나무를 온통 덮도록 달려서 멀리서 바라보면 때아닌 흰 눈이 온 듯하고 그 소복한 꽃송이가 밥사발에 소복이 얻은 흰 쌀밥처럼 보여 이름을 이밥나무라고 했으며, 이밥이 이팝으로 변했다고 한다. 사실 쌀밥을 이밥이라고 부른데도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조선시대 500년 동안 이씨가 왕조가 되면서 귀한 쌀밥은 왕족이나 양반인 이씨들이 먹는 밥이므로 이씨들의 밥이라 하여 이밥으로 불렀다고 하니 다소 틀어진 가난한 백성들의 심사가 보이는 듯하다. 이팝나무라는 이름의 유래에는 또 다른 견해가 있는데 이 꽃이 여름에 들어서는 입하에 피기 때문에 입하목(入夏木)이라 불렀고 입하가 연음되어 이파, 이팝으로 되었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전라북도 일부지방에서는 입하목이라고도 하며 그밖에 이암나무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 어청도 사람들은 뻣나무라고 한다.

예전엔 못자리가 한참일 즈음이면 동네마다 자리 잡은 아름드리 이팝나무에 가지마다 하얀 꽃이 가득가득 달려 그 일대는 온통 하얀 꽃구름이 일었다. 이 풍성한 꽃을 바라보면서 농부들은 올해도 풍년이 들 것을 예견하고 굽힌 허리가 아픈 줄도, 모내기가 고된 줄도 모르고 얼굴에 깊은 골을 그리며 함빡 웃었다.

요즈음 이팝나무는 주로 길에서 만난다. 올림픽도로를 지나다 만나는 이팝나무들은 그 거리의 그 어떤 나무보다도 회색의 도로와 먼지 속에서 마음을 맑게 한다. 청계천의 이팝나무들도 제법 자라 찾아오는 이들에게 오월의 볕을 적절히 가려준다. 5·18 묘역 가는 길 이팝나무는 개화기를 맞추어 뒤늦게 고른 가로수라고 하는데 그곳을 찾는 길목부터 마음에 위로를 주며 그 몫을 해내고 있다.

명소가 된 곳도 있다. 밀양 위양못의 오래되고 큰 이팝나무 무리들은 참으로 멋진 5월의 풍광을 만들어내고 있으며, 포항 흥해읍 옥성리에 조성된 이팝나무숲은 100~150년 정도의 수령을 가진 이팝나무 30여그루가 회화나무, 상수리나무 등과 어울려 참으로 멋지다.

천연기념물 이팝나무도 있다. 대개는 풍년을 예고하는 나무이다보니 농민들에게는 매년 꽃이 얼마나 피는지가 유별난 관심의 대상이었고 그런 간절한 눈으로 이 나무를 바라보며 오랜 세월이 흐르다 보니 동네마다 신목으로 추앙받아 당산목이 되기도 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진 것이다. 이런 나무들을 기상목이라고 한다. 전남 승주군 쌍암면의 천연기념물 36호, 경남 양산의 186호, 전북 진안에는 천연기념물 214호 이팝나무 등 여럿이다. 특히 235호 광양 유당공원 이팝나무는 큰 나무들이 줄지어 서있어 장관이다.

이팝나무는 남부지방에서 자라는 낙엽 지는 큰 키 나무이다. 물푸레나무과에 속하는 이 나무의 고향은 따뜻한 남쪽이고 해안을 따라서는 동쪽으로는 인천까지, 서쪽으로는 포항까지 올라온다. 그러나 옮겨 심으면 중부 내륙에 와서도 끄떡없이 잘 자란다. 이웃하는 나라에 더러 자라지만 세계적으로 희귀한 나무 축에 든다. 이처럼 화려한 꽃을 피우는 꽃나무는 대부분 작은 키 나무이기 쉬운데 이팝나무는 유난히 키가 커서 30m가 넘는 거목으로 자라나고 그래서 그 꽃들이 더욱더 유난스럽게 느껴진다. 꽃이 필 무렵이면 그 기세가 하도 강해서 어린아이 손바닥만 한 크기의 잘생긴 잎새도 잘 보이지 않는다. 꽃잎은 아래가 붙은 채 네 갈래로 갈라졌지만 너무 깊고 가늘게 갈라져 전혀 색다른 느낌을 준다. 한번 핀 꽃은 20일이 넘도록 은은한 향기를 사방에 내뿜으며 활짝 폈다가는 마치 눈이라도 내리듯 우수수 떨어지는 낙화 순간 또한 장관이다.

이즈음 풍성한 꽃이 어디 이팝나무만 있으랴. 엊그제 산책길에 꿀내음으로 발걸음을 멈추게 했던 아까시나무 꽃도 지천이고, 치렁치렁 늘어진 등꽃도 유난하다. 하지만 왜 이렇게 유난스레 이팝나무에 열중해 있는가 생각해 보았다. 빨라진 절기와 갑작스레 올라간 기온에 꽃풍년인 까닭도 있겠지만, 그 꽃들을 바라보면서 풍년이 오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기 때문은 아닐까. 옛 농부처럼 쌀농사의 풍흉을 걱정하는 데서 더 나아가 진짜 풍성하고 안정되고 풍요로운 세상에 대한 바람 말이다.

대선이 끝났다. 우리는 선거를 마치고 산행을 하면서 그 길에서 만난 나무를 조팝나무라고 말하는 이에게 이팝나무로 바로잡아주며 유래를 이야기해주는 새 대통령을 맞이했다. 이팝나무로 풍흉을 점치던 시절, 우리 조상들은 아랫마을과 윗마을이 모여 그 꽃들을 보며 내기를 했다고 한다. 어느 쪽이 더 풍년일지. 하지만 그 간절한 내기의 끝엔 화합의 장을 마련해 함께 어울렸다. 아랫마을 풍년이 윗마을에 오지 아니할 리 없지 않은가!

이 눈꽃송이처럼 순결하고 풍성한 꽃을 피워내는 이팝나무는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간절히 원하고 노력하면 함께 행복하게 잘살 수 있습니다.”

이유미 | 국립수목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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