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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개 이름은 나무였다. 영화배우처럼 멋진 갈색털과 군살 없이 당당한 몸매를 가진 개다. 그래서 가만히 들여다보면 가슴이 뭉클해질 만큼 맑은 눈을 가지고 있어서 문득 ‘영혼’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했다. 당연하지만 숲이나 들, 고랭지 채소밭의 가장자리, 하다못해 흔해 빠진 길 한복판에 그 개가 서 있거나 앉아 있는 걸 보면 그 모습이 너무도 아름답고 멋져 보였고 인간들은 자기도 모르게 사진을 찍게 된다. 그런 개였다. 나무는….

그런 개가 심지어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이 다정하기까지 했다. 멀리서 손님이 굽이굽이 산 아래까지 낯선 길을 더듬어 달려오면 ‘까칠한’ 주인의 결점을 채우듯 개가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며 말없이 숙소 가는 길을 안내해 주는 일이 일상이었다. 심지어 나무가 거실문 앞에 말없이 앉아서 자신을 지켜줬다, 이내 자신들을 숲의 오솔길로 이끌어 산책을 시켜줬다, 산 정상까지 함께 올라갔다 내려왔다. 버스정류장까지 배웅해줬다, 마을 슈퍼에 함께 마실 다녀왔다 등의 증언들이 숙소 방명록에 수두룩 쌓여 갔다.

생전의 나무.

‘개 테라피’가 따로 없었다. 무엇보다 개를 무서워하던 아이들이 나무와 개울이(나무와 달리 조금 뚱한 나의 검정개)를 만나면 이내 개를 좋아하게 되고 집에 돌아가 개에게 편지를 쓰는 아이도 있었다. 심지어 빼빼로데이에, 롯데제과 임원도 병적인 소외감을 느끼기 일쑤인 그날, 우리 개들에게 줄 리본 달린 초콜릿 상자와 함께 다시 오는 아이를 보며 얼마나 많이 웃었던가? 상자 안에는 이런 편지가 들어 있었다.

“나무야 개울아 안녕 잘 지내고 있지? 너희한테 다시 고기를 줄 날도 이제 멀지 않아. 또 아줌마랑 산책 나갈 때도 내 생각만 해. 다음에 또 만나자 아 그리고 너희도 서울로 놀러와 우리집으로 전화해줘 안녕. 온유 올림.”

그건 내가 읽은 어떤 책보다 나를 더 많이 웃게 하고 더 많이 행복하게 한 편지였다. 새삼 개라는 동물의 신비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이 메마르고 삭막한 세상으로부터 인간의 동심을 지켜주는 존재. 그토록 다정하고 신성한 인간의 친구로서의 개에 대해.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늘 불안했다. 대체로는 한 자리에 뿌리박힌 채 한평생을 사는 식물군 ‘나무’의 운명이 네 다리가 있는 자신에게는 무슨 오명이나 치욕이라도 되는 듯 묶어두면 아주 괴로워하고 풀어주면 좋아라 산으로 갔던 개였다. 한 번은 산에 가서 가까스로 올가미를 탈출했는지 끊긴 와이어 줄을 몸통에 매단 채 3박4일 만에 돌아온 일도 있었다. 그러면서도 지치지 않고 자유의 상태를 온몸으로 갈구했고 또 스스로 쟁취해냈던 개다. 덕분에 하루의 절반 이상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마음껏 호기심을 채우고 무슨 은혜를 베풀 듯 다정다감한 자기 존재감을 사방팔방 과시하며 살 수 있었다. 그러다 손님들로부터 이런 문자를 받으면 나는 얼른 달려가서 나무를 데려오곤 했다. “나무가 버스 정류장까지 따라올 태세인데 괜찮은가요?”

그런데 그날은 문자가 오지 않았다. 보통은 오전 9시 무렵 혼자서는 결코 손님을 따라 나서지 않는 개울이와 끈을 바꾸어 주는데 나무는 그보다 일찍 첫차를 타고 가는 두 명의 젊은 여자 손님들을 배웅하러 버스 정류장에 나갔다가 제 발로 돌아오지 못했다. 내가 온몸으로 달려오는 차들을 막고 도로 한복판에 쓰러져 있는 나무를 발견했을 때 이미 숨은 쉬지 않았고 피는 아직 따뜻했다.

처음 두 주 동안은 매일매일 울면서 나의 사랑스러운 개의 대가 없이 다정했을 배웅을 받으면서도 그 안위에 대해선 조금도 신경 쓰지 않은 그 여자들의 무신경을 원망했다. 그러다 도시인들의 ‘여유 없음’에 대해 생각했다. 하루하루 자신을 태우며 간신히 버티는 이들이 하루 마음먹고 자연 속에 쉬러 왔다. 모처럼 실컷 술을 마시고 음악을 듣는다. 숙소 서가에서 학교 때 좋아했던 기형도의 시집을 발견하고 기분이 좋아 조금 무리하게 마신다. 그렇게 쌓인 스트레스를 푼다. 너무도 짧은 휴식이다. 술도 잠도 덜 깬 이른 아침 다시 출근 길에 나서야 한다. 그런 이들에게 내 개의 안위까지 배려해주기를 바라는 나의 무신경. 그것에 대해서도 나는 생각했다

이제 내려놓는다. 부질없는 원망을. 그리고 의미를 찾기 시작한다. 우리 나무는 그렇게 멍청한 개가 아닌데 왜 집으로 돌아오는 길 대신 그 여자들을 태우고 서울로 가는 버스를 따라 갔을까 유추하며 머릿속으로 온갖 종류의 소설을 쓰고 또 영화를 만들었다. 그러다가 급기야 미친 여자처럼 웃었다. 서울에 올라가서 온유네 집에 전화하는 나무를 상상하니 슬픈 와중에도 너무도 사랑스러워서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 달이 지났다. 이제야 눈물 없이도 나무에 대해서 쓸 수 있게 됐다. 방랑벽이 있고 다정도 병이던 녀석, 내 언젠가 그럴 줄 알았다. 나무는 죽었지만 나는 아직도 그 죽음의 의미를 찾고 있다. 죽은 이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면 잘못된 거, 손상된 것들을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는다고 한 건 존 버거였다.

나는 안다. 개들이 문제를 일으키는 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다. 낯선 인간들에게 자신의 타고난 친절과 신성을 마음껏 베풀 기회가 ‘개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꿈꾼다. 개들이 줄이나 울타리 없이 ‘개판’인 듯 뛰어놀고 예술작품이 ‘개똥’처럼 굴러다니는 꿈의 산골 마을을. 아마 대충 10년쯤 걸릴 것이다. 다행이다. 마침 10년 동안이나 쓴 경향의 지면을 마치며 다른 10년을 예고할 수 있어서. 심지어 가슴이 떨린다. 뛰는 가슴을 안고 마지막 안녕을 고한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여러분 모두 안녕!!

<김경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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