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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안 버리기 잘했다. 비좁은 옷장 안에서 거의 10년 가까이 선택받지 못한 채 ‘애물단지’인 양 홀대받던 옷들이 요즘 다시금 ‘새롭게 주목받는 복고’란 의미의 ‘뉴트로’ 혹은 ‘힙트로’라는 이름으로 주목받고 있다. 예컨대 촌스러울 정도로 로고가 크게 박힌 맨투맨 티셔츠며 빈티지 체크 스커트, 본의 아니게 바닥 청소하기 좋을 만큼 품이 넉넉한 ‘배기 팬츠’ 같은 아이템들.

한때 C 브랜드의 프레스 세일 중에 샀던 과장된 어깨선의 오버사이즈 모직 코트는 좀 아깝게 됐다. 아무리 유행이 돌아와도 다시 입을 것 같지 않은 그 육중한 무게감에 질려서 어느 유난히 추운 겨울에 우리 개들 이부자리로 내주었다.

‘복고상권’을 이끌고 있는 서울 종로구 익선동 한옥마을 골목길. 경향신문 자료사진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그해 유난히 내 마음에 와 닿았던 H&M의 글로벌 캠페인 슬로건 “패션엔 규칙이 없다. 단 한 가지를 제외하고. 버려진 옷을 재활용하라”를 내 방식대로 해석하고 실천한 거나 다름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심지어 디테일에 내 나름의 ‘악마’를 담아 다음과 같이 슬로건으로 변화시킨 셈이다. “재활용하라. 그 밖의 패션 규칙 따위는 개나 주고!”

버리지 않아서 다행인 건 유행 지난 옷뿐만이 아니다. LP라 불리는 비닐 레코드의 귀환 시대를 지켜보면서도 카세트테이프도 언젠가 재조명되지 않을까 막연히 기대했지만 지금처럼 구찌 브랜드가 러브콜을 보내는 카세트테이프 전문숍이 생기고 LP도 모자라 카세트테이프로 신곡을 발표하는 뮤지션 소식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설사 그런 날이 오지 않는다 해도 그건 차마 버릴 수 없는 것이었다. 그건 그냥 물건이 아니라, 우리가 작은 아이거나 소년 소녀였을 때 좋아했던 음악들이 아스라이 거주하는 집이지 않은가? 예컨대 한때 우리의 심장을 건드린 음악들의 부서지기 쉬운 작은 오두막 같은 곳. 하지만 아직 부서지지 않은 사랑스러운 것들…. 그래서 남편과 나는 그것들을 버리기는커녕 되레 기회 있을 때마다 중고시장에 나와 있는 것들을 하나둘 사 모았고 그 덕분에 우리의 공간은 조금 더 사랑스러워졌다.

카세트테이프와 함께 돌아온 복고 열풍이 얼마나 대단한지 이른바 ‘복고상권’을 리드하고 있는 동네 익선동에 가보면 안다. 단순히 옛 시절의 소품 몇 점을 가져다 놓는 정도가 아니라 1920년대 모습을 그대로 유지한 낡은 한옥 동네 전체가 인테리어는 물론 그 메뉴와 정서까지 젊고 현대적인 감각으로 풀어낸 복고 콘셉트의 핫 플레이스로 진화한 것 같다.

뭐랄까? “거리는 산책자를 아주 먼 옛날에 사라져버린 시간으로 데려간다”고 했던 발터 베냐민의 문장을 실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동네 같다. ‘테트리스’나 ‘보글보글’ 같은 추억 어린 옛날 전자오락기 몇 대 들여놓고 무슨 자랑이라도 되는 양 ‘최신 게임 없음’이라고 써 놓은 오락실부터 그 수가 많지는 않지만 여하튼 만화와 더불어 모던하게 개조된 한옥 건넌방 같은 공간에서 잠시 쉬어 가기 좋은 ‘만홧가게’도 있고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만두를 소쿠리에 담아 꽃 그림이 새겨진 하얀 양철상 위에 놓아주는 분식점도 있다. 정말이지 낡고 익숙한 것에 새로운 감성을 입힌 ‘뉴트로’를 체험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가지각색의 상점들이 골목마다 가득했다. 그중 우리 커플은 앙버터 식빵과 인절미 티라미수, 단호박 식혜 등을 파는 카페 ‘서울커피’가 궁금했다. 하지만 길고 긴 대기 줄에 질려 이내 발걸음을 다른 곳으로 옮겨야 했지만 그것도 좋았다. 이탈리안 소스와 함께 매우 고급스럽게 플레이팅해서 내어주는 돈가스와 함박스테이크를 경양식집 콘셉트의 레스토랑에서 점심 먹고 민화 작가가 운영하는 예술적인 카페나 비디오방 콘셉트의 기이한 카페에서 커피를 마실 수 있으니까.

너무도 환영할 만한 일은 복고 트렌드 덕분에 생기 없이 죽어가던 골목 상권이 살아났다는 거다. 뿐만 아니라 쓸모를 잃고 버려지거나 잊혔던 물건들이 느닷없이 ‘핫’한 것으로 되살아났다. 구박받으며 자리만 차지하던 엄마의 자개장이 가장 핫한 인테리어 소품이 되어 카페 음료 카운터나 병풍으로 변신하는가 하면 어린 시절 그리도 흔히 재사용되던 델몬트 주스병이 로얄코펜하겐 주전자 못지않게 환영받는 요즘이다. 심지어 오란씨, 서울우유, 크라운 등 추억의 상표가 찍힌 공짜 로고컵이 이렇게 비싸게 거래되는 날이 올 줄이야. “취향의 시대는 죽은 것도 살려낸다”고 했던가? 맞는 말이다!

그러면서도 한편 살기 힘들어서, 지금보다 걱정 없이 살았던 과거를 그리워하는 심리의 발로로 레트로가 유행한다는 식의 분석 기사를 읽으면 살짝 코웃음이 난다. 누구나 할 수 있고 무한히 반복되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얘기일 뿐이다. 혹시라도 대중을 매혹하는 도시의 자영업자가 되고 싶다면 발터 베냐민이나 보들레르가 파리의 산책자로서 명상하듯 걸으면서 쓴 글들을 읽어 보자. 대중을 선도하는 가장 최신의 것이 가장 오래된 것, 이미 존재했던 것, 가장 친숙한 것에서 나오는 역설에 대해 알게 하는 글들. 아니다. 글보다는 산책을 더 권한다. “비바람에 풍화된 문지방 냄새를 맡고 오래된 기와를 만져보는 것에 더 행복해”할 수 있는 베냐민 같은 산책자가 되어 익선동이나 을지로, 문래동을 쏘다녀 보길 바란다. 그 안에 뭔가 있다. 오래된 추억과 최신의 감각 속을 함께 걸으면 경험하는 일종의 행복감, 혹은 기분 좋게 도취되는 도시의 감각.

<김경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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