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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를 쓴 와타나베 이타루가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격차를 벌리는 시스템입니다. 그런 문제를 조정하라고 정치가 있는 것이지만 결국 정치인들은 돈 많은 사람들의 손을 들어주고 말죠. 저는 ‘정치가 그래도 뭔가 해 줄 수 있을 것이다’라는 기대 자체를 버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인 1표의 정치적 등가성에 기초해 1원 1표의 시장적 차별을 해소하는 것이 정치다. 와타나베의 충고에 심정적으로 공감할 수 있다. 하지만 정치 외에 격차를 해소할 다른 사회적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역시 문제는 정치다.

정치가 보통사람의 고단한 삶을 개선하는 데 작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담고 있다고 하더라도 현실에서 그 정치의 효능이 체감되지 않을 때 정치는 잊히거나 거부된다. 민주정치와 선거의 경험이 쌓이면서 최근 정치를 ‘발견’하는 움직임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더불어 정치를 ‘부정’하는 움직임 역시 커지고 있다. 이 부정은 정치가 제 역할을 하거나 확장될 경우 손해를 보는 쪽이 주도한다.

따라서 진보가 치러야 할 첫 번째 싸움이 바로 대중이 정치를 발견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사회경제적 약자가 정치를 발견할 수 있게 되는 까닭은 그들의 주체적 자각이 아니라 진보 정당의 적극적 노력 때문이다.

언제나 그렇지는 않지만 대체로 보수는 사회경제적 이슈가 정치나 선거의 프레임으로 작동하는 것을 불편해한다. 사회경제적 프레임에 따르면 소수의 강자와 다수의 약자 간의 경쟁으로 유권자가 나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화나 종교, 지역 등의 아젠다로 사회경제적 프레임이 만들어지지 않도록 만든다. 우리가 알고 있는 미국의 뉴딜체제라는 것도 사회경제적 약자들, 즉 정치의 영역에서 배제된 ‘잊혀진 사람들’(the forgotten man)을 정치적 세력으로 묶어 이른바 ‘뉴딜연합’을 만들고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반대로 이 뉴딜체제의 해체는 보수가 문화나 도덕 이슈를 프레임으로 만들어 뉴딜의 사회경제적 프레임을 압도함으로써 가능했다.

보수는 복지체제의 사회경제적 효과를 직접 공격하지 않고, 우회했다. 레이건 대통령을 비롯한 보수는 정부로부터 복지혜택을 받아 캐딜락을 몰고 다닌다는 한 흑인 여성을 복지여왕(welfare queen)으로 개념화했다. 이는 복지를 통해 사회경제적 약자들이 더 손해를 봤다는 주장이 아니라 복지의 부당한 수혜를 문제 삼는 문화적 접근이다. 민주당 대통령 시기가 공화당 대통령 시기에 비해 경제가 더 좋았다는 사실은 객관적 데이터에 의해 증명된다. 따라서 보수는 대놓고 진보의 사회경제적 실패를 말할 수 없다. 그래서 문화적 도덕적 프레임에 집착한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23일 오후 관악구 신림동에서 고시촌 방문에 반대하는 한국청년연대 회원들과 관악 고시촌 1인 청년들이 피켓 시위대를 지나 청년 1인 가구 관련 타운홀 미팅장으로 이동하고 있다. (출처 : 경향DB)


한국의 보수도 이런 정치문법에 충실했다. 2012년의 총선·대선에서 복지나 경제민주화가 쟁점화되지 않게 만들었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의 참패에서 보듯 복지 찬반으로 가서는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최근 보수진영 일각에서 복지 찬반논쟁을 다시 들고 나오고 있다. 홍준표 경남도지사의 무상급식 중단이 대표적인 사례다. 2008년 대선에서 흑인 후보에게 패배한 뒤 2년 만에 치러진 중간선거에서 대승할 정도로 강한 미국의 공화당조차도 저소득층과 노인 장애인을 위한 의료 프로그램인 메디케어(Medicare) 메디케이드((Medicaid)만큼은 손대지 못한다. 복지체험이 지닌 강력한 소구력 때문이다.

사실 새누리당의 선거 스트레스는 작지 않다. 경제적 성과는 초라하기 짝이 없다. 외교 안보도 시원찮다. 뭐 하나 내세울 게 없다. 보수정권 7년에 대한 피로감도 크다. 이런 약점을 메울 강력한 차기 대선주자도 없다. 어떻게 할까. 홍준표 지사가 선도한 복지에 대한 찬반논쟁으로 갈 수도 있고, 최근 시작한 사정 드라이브를 정치권으로 끌고 가 도덕성 논란을 조성할 수도 있다. 또 심상정 원내대표가 말한 용북(用北) 정치, 안보 이슈를 제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본질은 하나다. 성과 없음을 숨기고 사회경제적 프레임의 작동을 막는 것이다.

관건은 야권의 대응이다. 사람답게 살기 위해 필요한 기본적인 삶의 요건을 제공받아야 하는 권리가 T 마셜의 사회권(social right)이다. 쉽게 말해 ‘살 권리’라 할 수 있는데, 진보는 여기에 집중해야 한다. 보수가 유혹하는 민주 프레임에 빠지지 않고, 사회경제적 프레임을 버텨내야 보통사람이 정치를 발견하고 자기 삶을 위해 투표에 나설 것이다.


이철희 | 두문정치전략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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