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대통령제의 원조국가라서 그런지 미국에는 대통령의 날이라는 게 있다. 공휴일로 지정돼 있다. 처음엔 초대 대통령 워싱턴의 생일 2월22일을 대통령의 날(President’s Day)로 했다. 후에 분단의 위기를 막아낸 링컨 대통령도 포함시키자는 의견이 대두됨에 따라, 링컨 대통령의 생일 2월12일과 워싱턴의 생일 사이 중간 날짜로 정했다. 1971년에 매년 2월의 세 번째 월요일로 고정됐다. 명칭도 대통령들의 날(Presidents’ Day)로 바뀌었다.

우리나라에서 대통령의 날을 지정하자고 하면 진보와 보수 간의 큰 다툼이 쉽게 예상된다. 보수는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들을 기준으로 삼자고 하고, 진보는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들을 근간으로 세우려 할 것이다. 역대 대통령의 업적을 기리고자 하는 취지는 온데간데없고 날선 공방에 분열만 가중되기 십상이다. 자신의 정치성향에 따라 어떤 대통령을 존경하는지는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그런데 누구를 좋아하는지가 서로 다르다고 해서 그것이 곧 분열로 귀결되는 건 아니다.

호오의 감정이 찬반의 대립으로 표출되도록 만드는 건 정치다. 정치적 유불리 때문에 누가 더 잘했다고 강변하고, 누구는 못했다고 매도한다. 과거가 현재의 편 가르기 수단으로 활용되는 셈이다.

역사가 크로체의 말 그대로 ‘모든 역사는 현대사’이기 때문에 이 또한 그런대로 수긍할 수 있는 현상이다. 그런데 문제는 누가 잘했는지에 대한 주장을 사실에 입각해 차분하게 펼치는 것이 아니라, 온통 반대편의 우상을 폄훼하고 악마화하는 데 집중하는 것이다. 혐오정치(hate politics)다. 혐오범죄가 그렇듯 혐오정치는 부정과 불신을 부추긴다. 이 혐오정치의 중심에 박근혜 대통령이 서 있다.

박 대통령에게는 ‘내 탓이오’가 없다. 스스로 옳다고 여기면 국민이 어떻게 생각하든 개의치 않는다. 상대에 대한 배려가 없다. 모든 것을 진영논리에 입각해 판단하고, 행동한다. 야당 대표일 때는 현직 대통령에게 “참 나쁜 대통령”이라고 비판하더니, 대통령이 되어서는 “대통령에 대한 모독적인 발언이 그 도를 넘고 있다”고 야당을 힐난한다.

대통령도 정당 공천으로 출마해 당선된 것이니 당파성을 갖는 건 당연하다. 그럼에도 우리 헌법에는 대통령에게 초당파성도 요구하고 있다. 미국의 헌법에는 없는 국가원수 규정을 헌법 66조에 두고 있다. 헌법개정 제안권(128조), 국민투표 부의권(72조) 등도 대통령에게 통합·조정자로서의 역할을 권장하기 위한 것들이다.

대통령이란 단어는 그간 쓰이던 통령이란 말에 대(大)자를 붙인 것이다. 일본이 president를 대통령이라고 번역한 데서 비롯됐다. 영어의 어원은 앞(pre)과 자리하다(side)가 결합된 것이다. 앞에 앉아서 사회를 본다는 의미다. 어떤 편이 아니라 서로 다른 편의 논의와 갈등을 조정하고 통합한다는 얘기다. 원래 어원도 그렇고, 우리 헌법에도 초당파성을 명시해 놓았다면 대통령은 그 역할을 해야 한다. 당파성으로부터 늘 초연할 수는 없지만 필요한 때 통합자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것만큼은 일종의 강제사항이다. 조정자, 통합자의 역할을 해내지 못한다면 그 순간 대통령은 반통령(半統領)으로 전락하고 만다.

박근혜 대통령이 1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제96주년 3.1절 기념식장에 입장을 하고 있다. (출처 : 경향DB)


지금의 박 대통령은 딱 반통령이다. 40%도 안 되는 지지율 때문만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지지한다는 건 그가 분열보다는 통합에 충실하다고 평가할 수는 있다. 그러나 통합을 지향하나 그 성과가 미미한 탓에 지지율이 낮을 수도 있다. 따라서 지지율은 하나의 척도일 뿐 그것 하나만으로 반통령이라는 건 아니다. 이유는 이렇다.

박 대통령은 인사나 정책에서 야권 또는 진보를 전혀 배려하지 않는다. 적으로 보는 건 아닌가 싶은 생각마저 들게 하는 때도 있다. 핵심 요직에는 영남이 득세하고, 좋은 자리에는 줄줄이 낙하산이다. 복지나 경제민주화 공약은 수정·파기됐다. 이러한 반통령의 길은 실패가 명약관화하다. 하지만 성공의 길도 있다. 명실공히 그 이름과 헌법이 요구하는 대로 모두의 대통령이 되는 것이다. 대통령직에 있다고 곧 대통령은 아니다. 대통령다워야 대통령이다. 무릇 얻으려면 먼저 주라(與之爲取)고 했다. <사기>의 이 충고, 얼마나 유용한가. 혐오정치가 아니라 포용정치로 가야 한다. 그래서 훗날 대통령의 날로 기념되지는 않더라도 그런대로 괜찮았던 대통령으로 기억될 수 있으면 좋겠다.


이철희 | 두문정치전략연구소장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