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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만들어가는 것이다. 하나의 결과나 현상에 매몰되면 금세 뒤처지거나 길을 잃게 된다. 끊임없이 변화를 모색해야 하는 건 정치의 숙명이다. 영국의 노동당이 1979년부터 18년 동안 야당 생활을 할 때 당의 내부에서 10년 넘게 혁신 작업을 주도하던 인물이 필립 굴드다. 그는 원래 여론조사, 홍보 전문가였다. 2011년 61세의 나이에 세상을 뜬 그를 두고 토니 블레어는 ‘길을 찾는 사람(pathfinder)’이라 평했다. 굴드가 노동당 집권의 길을 연 선도자라는 얘기인데, 굴드는 그 여정을 끝없는 혁신의 연속(unfinished revolution)이라고 칭했다. 정치의 핵심을 잘 짚은 말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이 신년 기자회견을 기점으로 급속하게 떨어졌다. 한국갤럽의 조사를 기준으로 보면 아직 30%를 못 넘어서고 있다. 박 대통령이 국정을 잘못 운영하고 있다는 여론이 60%를 넘기고 있으니 여권으로선 심각한 위기다. 집권 2년도 못돼 닥친 대통령의 몰락이니 여권으로선 당황스럽고 허둥댈 수밖에 없다.

어떤 해법을 찾을까 유심히 지켜봤는데, 역시 새누리당은 위기를 다룰 줄 아는 정당이다. 2004년 차떼기 정당이란 오명 아래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을 때 그들은 신예 박근혜를 얼굴로 내세웠다. 성공했다.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패배하자 박근혜 카드를 뽑았다. 총선이 임박한 시점에서 당의 다수파이던 친이그룹조차 공천권 등 비상대권을 박근혜에게 맡겼다. 성공했다.

총선을 1년여 앞둔 2015년 2월 예기치 않게 엄습한 위기, 새누리당은 위기탈출의 해법으로 유승민 카드를 선택했다. 2004년 17대 총선과 2012년 19대 총선 때의 위기 돌파와 같은 해법이다.

물론 차이점도 있다. 2004년만큼 위기의 강도도 세지 않고, 2011년의 박근혜만큼 대중성이 크지 않다. 그럼에도 새누리당이 위기를 위기로 인식하고 그에 대한 해법을 모색하는 것을 보면 새누리당은 정당답다.

열린우리당 시절 위기 앞에 남 탓 공방에 당내 갈등만 키워 결국 무너졌던 지금의 새정치민주연합으로선 엄두도 내기 어려운 터닝이고 기율이다. 선당후사를 외치는 건 새정치민주연합인데, 실제 그 정신이 작동하는 건 새누리당이다.

유승민 원내대표의 선택에서 친박과 비박 간의 갈등은 부차적이다. 본질은 다른 데에 있다.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는 개혁적 스탠스로 승리했다. 그러나 그는 인수위에서부터 보수적 스탠스로 회귀했다. 경제민주화를 버렸고, 복지 공약을 축소했다. 여권 내에서도 낡은 보수들이 득세했고, 개혁파는 위축됐다. 대통령의 몰락이란 상황을 개혁파가 기민하게 기회로 잘 포착해냈다. 유승민 카드의 본질은 비박이 아니라 개혁이다. 현재의 여론지형과 선거에서 개혁적 보수가 아니고선 이기기 어렵다는 인식이 승리했다는 얘기다. 유 원내대표는 보수의 본거지인 대구 출신임에도 경제민주화를 주장하는 개혁파다. 경제통이기도 하니 2012년 대선 때의 박근혜보다 훨씬 업그레이드된 존재다.

유 원내대표에게 부족한 건 대중성이다. 낯선 인물이다. 따라서 여권이 위기국면을 수습하고, 야당의 공세를 무디게 하는 효과는 분명하다. 그럼에도 ‘유승민 효과’가 ‘유승민 현상’으로 발전할지는 미지수다. 초반의 메시지 관리를 보면 시작은 괜찮다. 하지만 박 대통령의 벽을 넘어서야 하고, 김무성 대표의 견제를 극복해야 한다.

새누리당 유승민 원내대표가 11일 국회 원내대표실에서 열린 당 공무원연금개혁특위 및 공무원단체 노조대표 간담회에서 이충재 전국공무원노동조합 위원장과 인사를 한 후 자리를 안내하고 있다. (출처 : 경향DB)


박 대통령에게서 개혁 요소를 털어내고 낡은 보수로 돌아가게 한 세력의 공세도 이겨내야 한다. 그들도 당장은 공세를 자제할 것이다. 대통령의 인기가 바닥이고, 총선이 눈앞에 다가왔기 때문이다. 총선에서의 패배는 너무도 큰 시련을 예고하는 것이기 때문에 승리를 위해 참아야 한다. 하지만 박 대통령의 인기가 어느 정도 회복되고, 그 힘으로 총선에서 이길 가능성이 생기면 유승민 효과는 현저하게 약화될 것이다.

유 원내대표의 등장이 야당에도 불편할 수 있다. 이명박 정부 때의 박근혜처럼 유 원내대표가 야당 역할을 대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의 독점이 새정치민주연합이 누리는 엄청난 이점이니 불안감을 느끼는 것도 일리는 있다. 그런데 진보진영은 민주 대 반민주의 찬반구도에서 벗어나 사회경제적 프레임에서 우열을 다투는 구도로 전환해야 유리하다. 유 원내대표의 등장은 전환의 좋은 계기다. 새정치민주연합은 그가 개혁성을 온전하게 드러낼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어렵지만 그게 결국 이기는 길이다.


이철희 | 두문정치전략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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