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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광 |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류승완 감독의 <베를린>이 관심을 끌고 있다. 보기에 따라서 할리우드 스파이 영화를 흉내 낸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스파이 영화 장르의 특성보다도 액션 영화 장르의 특성이 더 강하다는 이런저런 평가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 흥미로운 지점은 이 영화가 ‘국가’와 ‘개인’을 대립시키는 할리우드의 장르법칙을 남북대치라는 소재로 버무려놓았다는 사실이다.


(경향신문DB)


왜 이것이 중요한 변화일까? 과거에 남북문제를 소재로 삼은 영화들은 대체로 이데올로기의 희생자로서 개인을 다루고 있지만, <베를린>은 이런 익숙한 설정을 폐기하고 있다. 이데올로기가 있던 자리에 ‘국가’가 들어선 것이다. 사소한 변화일 수도 있지만, 블록버스터 영화가 가장 민감하게 대중의 변화를 읽어내는 장르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이 영화가 다루고 있는 소재는 범상한 것이 아니다. 물론 이 변화의 기원은 ‘제이슨 본’ 시리즈였다. 특히 이 시리즈의 후속편이라고 할 수 있는 <본 레거시>는 혀를 내두를 정도로 치밀하게 국가에 대한 음모이론을 흥행서사로 엮어냈다. 할리우드 영화에 변화의 조짐이 있었던 것이다. 흐름을 주도하는 것은 아니지만, <베를린>이 여기에 속하는 것은 확실하다. 따라서 <베를린>을 보고, 거기에 대해 트윗을 날리고, 토론하고, 글을 쓰는 행위는 모종의 가치 변화를 알려주는 징조인 셈이다. 영화는 이런 맥락에서 대중의 교과서이다.



영화에 대한 이야기에 그친다면 <베를린>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그렇게 주목할 만한 사건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의 출범과 이 문제를 함께 고민하면 상황은 달라진다. 새 정부에 대해 반대자들조차도 유보적인 태도를 취하는 까닭은 박 당선인의 공약에 포함되어 있는 국가 기능의 강화 때문일 것이다. 새누리당마저도 진보적인 의제를 공약으로 삼을 수밖에 없는 조건이 있었는데, 시장만능주의에 대한 회의의 시선이 그것이다. 지난 대선을 한마디로 평가하자면, 정치적 의제의 측면에서 미국과 상동성이 상당히 높아졌다는 점일 것이다. 그동안 한국에서 정치적 의제를 만들어냈던 세 가지 입장은 민족주의와 유럽 사민주의, 그리고 미국 자유주의였다고 볼 수 있는데, 지난 대선은 민족주의와 유럽 사민주의의 퇴조를 명확하게 보여줬다는 느낌이다. 물론 유럽 사민주의와 미국 자유주의는 겹치는 부분이 없지 않다는 점에서 전체적으로 자유주의적인 기조가 대선을 통해 주류 담론으로 안착했다는 판단이다.


<베를린>이 그려내는 ‘국가의 피해자들’은 이런 흐름에서 본다면 자연스러운 것이다. 지금 현재 20~30대의 정서를 구성하고 있는 문제의식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탈리아 출신 미국 경제학자인 루이지 진갈레스 같은 이들은 오늘날 미국 자본주의의 위기 원인으로 ‘연고주의’를 서슴없이 꼽는다. 그가 말하는 “국민을 위한 자본주의”는 미국 경제에 활력을 제공했던 토대였다. 국가를 구성하는 국민에게 골고루 ‘기회의 평등’을 보장해야 한다는 원칙이 미국 자본주의를 발전시킨 원동력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낯설지 않은 내용이지만, 중요한 것은 진갈레스가 이런 토대를 다시 회복하기 위해 ‘연고주의’를 통해 지탱되는 기득권을 타파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는 사실이다. 진갈레스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라구람 라잔도 자본가들로부터 자본주의를 탈취해서 국민에게 평등한 혜택이 돌아가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지난 대선에서 분출했던 세대갈등이 기득권에 대한 20~30대의 반감에 기인했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이들의 주장은 한국에서도 충분히 설득력을 가질 것 같다. 한국의 보수인사들 중에도 유사한 입장을 표명하는 경우를 심심찮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귓등으로 들으면 이들의 입장은 우파보다는 좌파에 더 가까운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단도직입해서 말하자면, 이들의 주장은 1980년대 이후에 새로운 천년왕국을 약속했던 금융자본의 풍월을 되풀이하는 것뿐이다. 2008년 세계 경제위기를 근본적인 것으로 파악하려는 움직임에 비해서 “국민을 위한 자본주의”를 복원해야 한다는 생각은 순진하게 들리기까지 한다. 문제는 이런 생각들이 한국 사회의 보수주의를 새롭게 재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결과물이 어떤 것일지 아직 단정지을 수 없지만, 여하튼 이 상황은 지금까지 87년 체제에 안주해왔던 진보와 보수 모두에게 심각한 위기를 예고한다.


말하자면, 이런 변화는 국가를 더 이상 권위의 집행기구라기보다 멤버십의 혜택을 평등하게 분배해주는 서비스 기관에 가깝게 파악하는 정서를 반영한다. 이명박 정부가 제대로 포착하지 못했던 것이 이 같은 국가관의 전환이었다. 복지국가에 대한 요청도 이런 변화의 결과다. 박근혜 정부의 성공은 달라진 상황을 얼마나 적절하게 국정의 차원으로 내려앉힐 수 있는지 그 여부에 달려 있다. ‘애국 보수의 궐기’를 부르짖던 과거의 행태에 안주하는 것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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