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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광 |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문재인 후보와 이정희 후보에 대한 시인 김지하의 발언이 화제다. 거의 ‘막말’ 수준이라는 평가다. <나꼼수>의 ‘막말’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던 보수언론이 김지하의 표현을 여과 없이 내보낸 것은 어딘가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다. 나에게 김지하의 ‘막말’보다도 흥미로웠던 것은 민청학련 무죄 판결에 대한 인터뷰에서 나왔던 “돈이나 많이 줬으면 좋겠다”는 말이었다.
경우에 따라서 이 말은 최근 김지하의 행보를 설명해주는 근거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를 근거로 김지하가 ‘돈 때문에’ 박근혜 당선인을 옹호하기로 마음먹었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은 비약에 지나지 않는다. 비록 표현수위는 높았지만, 그의 인터뷰에 등장한 여러 문제의식들은 비슷한 연령대의 ‘어른들’ 사이에서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는 이야기였다. 말하자면, 이런 소리들은 시인이라는 권위를 등에 업긴 했지만, 결국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평범한 내용일 뿐이라는 것이 적절한 판단이다.
대선 앞두고 김지하 선생 강연 (경향신문DB)
시인도 그냥 시인이 아니고, 민주화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던 김지하가 그 나이 또래에서 발견할 수 있는 ‘보통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만감이 교차하게 만든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만든 것인지 질문한다면, 그 대답은 “돈이나 많이 줬으면 좋겠다”는 말에 들어 있다는 생각이다. 신산했던 과거의 삶을 화폐라는 교환가치로 환원시킬 수 있다는 전제가 이 한마디에 들어 있다. 시가 교환되지 않는 것에 대한 송가이며, 그 자체가 교환체계를 벗어남으로써 존립할 수 있다는 시학이 이 지점에서 무너진다. 그는 시인의 자리에서 내려와 버린 것이다.
많은 이들이 오해하는 것과 달리, 마르크스는 단순하게 자본가를 나쁘다고 말했던 것이 아니라, 그들이 절대화하는 자본주의가 어떻게 필연적으로 해체될 수밖에 없는 모순을 간직하고 있는 것인지 밝히고자 했다. 당시에 자본가를 ‘놀고먹는 집단’으로 묘사하면서 사회악으로 규정했던 사상가들은 많이 있었다. 요즘 시장자유주의자들이 금과옥조처럼 떠받드는 애덤 스미스 같은 이들에게 자본가들은 일하지 않고 부당한 특권을 누리는 대표적인 ‘도둑의 무리’였다.
마르크스에게 자본주의의 문제는 화폐의 작동에 있었다. 상품을 아무리 많이 만들어도 팔지 못하면 이윤을 남길 수 없다. 이렇게 사고파는 행위가 교환 관계를 형성한다. 보통 노동자라고 하면, 생산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노동력을 파는 존재이다. 이 경우에 노동력이야말로 상품이다. 최근 들어 유행하고 있는 ‘스펙’이라는 말은 노동력의 가치를 높여서 팔아야 한다는 절박한 위기의식을 반영한 용어법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이렇게 팔 수 있는 노동력의 가치에 따라 능력이 판명나는 것이 요즘 현실이다.
시인 김지하는 ‘아들들’ 때문에 돈이 필요하다고 했다. 다른 사람들처럼 공부를 시켜야 하기 때문이라는 논리다. 이런 주장에 따르면, 그는 ‘아들들’에게 적절한 ‘스펙’을 만들어주지 못한 ‘나쁜 아버지’가 되는 셈이다. 일상생활에 스며든 신자유주의의 논리는 ‘인간 자본’의 확충을 위해 부모의 역할을 강조한다. 훌륭한 설비를 갖추는 것 못지않게 인재의 창조성을 발양해야 생산력이 높아진다는 ‘경제학적 근거들’이 제시되면서, 자기 자식들의 능력치에 따라 좋은 부모와 나쁜 부모로 나뉘게 된다. 이런 논리가 장삼이사들의 생활세계를 지배하는 것이다.
김지하의 ‘평범화’는 무엇을 시사하는 것일까? 과거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라고 일갈할 때만 해도 그는 시인의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당시에 그는 ‘젊은 벗들’과 소통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가 보여주는 태도는 그것과 한참 거리가 멀다. 이런 김지하의 모습에 비추어 지난 대선 당시 50대 이상 유권자들의 심경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한때 참여정부를 지지했다가 돌아선 이들 또한 비슷한 논리를 마음에 품고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역사의 굽이에서 도드라졌던 시인마저 ‘평범한 아버지’로 만들어버린 것은 자기계발을 삶의 정언명령으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이데올로기의 위력이다. 87년 체제가 만들어낸 정치구도는 이제 더 이상 의미를 가질 수 없게 됐다. 생활세계는 보수주의로 장악되어 버렸다. 물론 이 상황이 과거에 연연하는 보수에게도 유리하다고 말하긴 어렵다. 붕괴해 버린 진보의 유령이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위해 필요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냉전이데올로기의 무덤을 파헤치면서 ‘종북논쟁’을 부활시키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새로운 이념이 필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한때 유토피아의 표상이었던 시인이 더 이상 시인으로서 존재할 수 없다는 상황이 정확하게 이를 말해준다. 시인은 잠수함의 토끼 같은 존재라고 했다. 산소가 떨어지면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이는 토끼 말이다. 저항시인으로서 의미를 가졌던 김지하의 상징성이 끝났다는 것은 진보와 보수를 지탱해왔던 구조가 더 이상 존속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바야흐로 새로운 것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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