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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선이 한국에서도 화제다. 정가는 물론이고 장삼이사들에게도 관심거리이다. 그만큼 이변이 많다는 의미일 것이다. 미국 대선이 세간의 이목을 집중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버니 샌더스와 도널드 트럼프 때문이다. 힐러리도 관심을 끌 만한 정치인이긴 하지만, 샌더스와 트럼프가 일으킨 ‘바람’이 없었다면 이만큼 미국 대선이 먼 나라 호사가의 입에 오르내리진 않았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내게 흥미로운 것은 샌더스 ‘열풍’이라기보다 트럼프 ‘광풍’이다.

미국의 문화비평가이자 교육학자인 헨리 지루는 최근 한 방송과 이루어진 인터뷰에서 트럼프가 어떤 정치인인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를 지지하는 이들이 민주주의에 반대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는 의미심장한 논평을 남겼다. 트럼프의 태도나 성격을 거론하면서 대통령 후보 자격이 없다거나 히틀러와 다르지 않은 파시스트라고 자질 문제를 제기하지만, 여기에서 부정할 수 없는 것은 바로 트럼프를 지지함으로써 민주주의에 반대하는 이들이 엄연히 미국에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지루의 발언이 암시하는 것처럼, 이른바 전후 세계체제에서 자유민주주의의 경찰 노릇을 자임해온 미국의 한복판에서 식을 줄 모르고 끓어오르는 트럼프에 대한 지지는 참으로 자가당착적인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물론 트럼프의 출현이 전혀 생뚱맞은 돌발 상황은 아니다. 트럼프의 지지율을 떠받치고 있는 요소 중 하나가 반지성주의라는 일부 지적이 있는데, 미국은 이 방면에서 본토라고 할 만하다. 반지성주의라는 것은 지식인에 대한 불신과 반감에 기초해서 지적인 작업 전반에 대한 경멸적인 태도를 드러내는 사회적 경향이다.

리처드 호프스태터는 <미국의 반지성주의>라는 책에서 미국 반지성주의의 뿌리가 기독교 복음주의에 있다는 사실을 적시하고 있다. 복음주의의 신생활운동을 주도했던 이들은 기존 성직자들을 ‘위선적인 집단’이라고 비판하면서 ‘오직 성서로 돌아가자’라는 기치를 내걸고 호전적인 반지성주의 운동을 펼쳤다.

이처럼 트럼프에 대한 지지는 지식인 자체를 좌파로 간주하고 견제하는 우파적인 경향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한 기독교 복음주의를 동력 삼아 미국 사회에 복류하고 있던 반지성주의적 경향이 노골적으로 분출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반지성주의는 정치와 정치인에 대한 혐오를 내포하는 것이기도 하다. 트럼프는 이런 정치 혐오에 기대어 자신의 지지율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런 정치 혐오의 정도로 친다면, 한국도 미국과 별반 다를 것이 없지 않나 싶다.


흥미롭게도 한국의 몇몇 정치인들은 자신을 샌더스에 빗대어 언급하곤 했다. 이른바 정치혁신을 이끄는 새로운 ‘바람’의 주역이고 싶다는 의지의 표명일 것이리라. 그런데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평소 한국 정치인들의 행태를 보면 샌더스보다는 트럼프에 더 가까운 이들이 더 많은데 왜 이들은 샌더스에 자신들을 즐겨 비유하려고 했던 것일까. 한국 정치인들 중 트럼프와 자신을 비교하는 경우는 없었다. 한국 정치인들 중에 트럼프에 준하는 이는 없는 것일까.

얼마 전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와 더불어민주당 박영선 의원은 보수기독교계가 주최한 국회기도회에 참석해 기독교 교리를 들먹이면서 동성애법과 차별금지법에 공개적으로 반대 의사를 밝혔다. 여야를 막론하고 이들이 밝힌 입장은 지금 미국 대선 캠페인에서 트럼프가 온갖 막말을 동원해서 부르짖는 내용을 그대로 빼다 박은 것이다. 이들에게 왜 이런 발언을 했는지 물어본다면 아마도 본심은 그렇지 않은데 기독교계의 지지가 필요해서 그랬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본심이야 어떻든 이런 발언을 기독교계가 지지한다면, 한국에 만연한 극우주의의 온상이 기독교계라는 사실만은 다시 한번 확인되는 셈이다.

트럼프는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해 평소에 미국 사회에서 쉬쉬하고 있던 온갖 사안에 대한 ‘속 시원한 대책’을 내놓는다. 대개 이런 대책은 민주주의라는 원칙 때문에 감수해야 하는 복잡하고 피곤한 절차를 무시하는 것이다. 또한 트럼프는 모든 미국인이 자기처럼 부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함으로써 아메리칸 드림을 자기 방식대로 약속한다. 과연 이런 트럼프가 자격 미달 정치인의 광기라고 볼 수 있을까.

한국의 정치현실을 돌아보면, 이런 ‘트럼프 현상’은 결코 낯선 것이 아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트럼프와 크게 다르지 않은 정치인들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지지를 획득하는 것이라면 온갖 막말도 서슴지 않는 모습을 본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다. 국회에 입문하는 것을 ‘개인적 출세’라고 생각하는 것도 트럼프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이들은 자신들의 모습을 트럼프에 비기지 않고 샌더스나 힐러리에 겹쳐 보려고 한다. 이런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정치 선진국이라는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트럼프 현상은 이미 한국의 정치가 실현하고 있는 ‘오래된 미래’이다. 그나마 희망이 있다면, 보이는 모습이야 어떠하든 한국의 정치인들이 자신을 트럼프와 다르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이런 동기를 ‘양심’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대중의 지지에 끌려다니지 않고 자신의 소신에 따라 움직일 수 있는 ‘용기’까지 우리 정치인들이 갖추기를 희망하는 것이 과한 욕심은 아닐 것이다.


이택광 |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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