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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총선의 특징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여야의 구분이 따로 없다는 점인 것 같다. 여야가 있는 것이 아니라, ‘정치인들’이 있다. 선거라는 공간이 열리자마자 평소에 숨어 있던 긴장들이 모래알처럼 분열했다. 과거 같으면 민주 대 반민주로 나뉘어서 야당과 여당이 명분 싸움을 했겠지만, 이제는 야당이든 여당이든 다 상대방에게 책임을 떠넘기면서 심판론을 제기하고 있다.

이 심판의 근거는 바로 경제이다. 야당이 경제 문제를 정부와 여당의 정책 실패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면, 여당은 현안을 해결하기 위한 법안을 제때에 통과시켜주지 않은 야당의 책임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설득력으로 치자면 여당의 주장은 다소 억지스럽다. 여당 관계자들도 인정하듯이, 지금 현재 불거지고 있는 양극화나 청년실업 문제, 그리고 경제성장 둔화는 현 정부 들어 발생한 것이라기보다, 보수 집권 훨씬 이전부터 잠복해 있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경제 문제에 관한 한 여야 모두 떳떳하게 자신들의 성공을 장담할 수 없는 입장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김종인 대표를 영입해서 “문제는 경제야”라는 오래된 빌 클린턴의 전략을 ‘재활용’하는 야당이 오히려 문제를 적절히 파악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적절하게 문제를 파악했다고 해서 그 문제의 답이 선거결과로 주어질지는 미지수다. 오히려 경제 문제를 내세우면서 정치를 쓸모없는 과잉으로 받아들이게 만들었던 장본인들이 보수였다는 사실을 직시한다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야당의 ‘보수화’가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왜 이런 아이러니가 발생하는 것일까. 어떤 이들은 더민주가 야성을 잃었고, 진보의 이념을 포기했다고 주장한다. 일견 맞는 말이지만, 그렇다고 더민주가 집권하기 위해 야성을 되찾고 왼쪽으로 이념적 위치를 옮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유주의가 금과옥조로 내세우는 대의민주주의에서 중요한 것은 집권이지 야성과 이념일 수 없다. 이른바 ‘차악 선택론’은 한국 정치가 미개하거나 후진적이어서 발생한다기보다, 대의민주주의를 가능하게 만드는 본질에 가까운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미국 선거에서 트럼프가 일으키고 있는 반향은 ‘막말’보다도 이런 대의민주주의의 약점을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감히 자유주의자들이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규범 때문에 발설하지 못했던 민감한 사안에 대해 마음껏 직설화법을 구사했다. 그의 직설화법은 공화당 내에서도 반발을 초래할 정도로 파장을 일으켰다. 할리우드에서 진보적인 배우로 통했던 <델마와 루이스>의 주인공 수전 서랜던은 힐러리 클린턴과 트럼프가 대선에서 후보로 겨룰 경우 누구를 지지할지 질문하는 기자에게 선뜻 힐러리를 지지하지 않을 것 같다는 대답을 하기도 했다.

애매모호한 서랜던의 입장은 가난한 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 대의민주주의의 문제점을 트럼프가 외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 민주주의의 문제점을 한국 정치의 후진성이나 미개한 국민성으로 인해 발생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상식으로 통했지만, ‘정치 선진국’이라고 숭앙을 받던 그 미국 본토에서 벌어지고 있는 ‘트럼프 현상’은 이런 상식을 거스르는 사건이라고 할 만하다.

자유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엘리트정치를 지향한다. 엘리트는 이른바 ‘검증된 전문가’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렇게 전문성에 바탕을 둔 ‘상호 감시’의 기능을 담당하는 당사자가 바로 시민사회이다. 선거를 통해 선출되지 않았을 뿐, 시민사회 역시 ‘검증된 전문가’라는 점에서 정치집단과 대등한 지위에 놓인다. 정치집단과 경쟁하면서 감시기능을 수행하는 시민사회는 현대 정치를 구성하는 필수적인 구성요소였다. 문제는 이 시민사회가 더 이상 감시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발생한다고 할 수 있다. 시민사회의 경험이 정당정치로 진입하기 위한 경력으로 포장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치더라도, 사실상 거대정당 이외의 정치는 정치적 의제에 속하지 않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는 자유민주주의 정치 자체의 종언을 드러내는 징후인 것처럼 보인다.

엘리트정치를 당위적인 것으로 인준하는 자유민주주의의 명분은 전문가 집단의 상호 감시가 특정 집단의 독주를 막을 수 있다는 원칙에 근거한다. 그런데 그 시민사회의 감시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 원칙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 원칙이 무력해질 때 트럼프 같은 정치인들이 출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공천 파동이니 야권 분열이니 온갖 부정적 수사들이 난무하고 있지만, 이번 선거만큼 상식을 뛰어넘는 양상을 드러낸 경우도 없었다. 예측불가능한 이변들이 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속출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그것만이 자유민주주의가 만들어놓은 교착상태를 해결할 가능성을 희미하게나마 확인시켜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택광 |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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