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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광 |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4·11 총선에서 여야가 얻은 성적표를 두고 여러 해석들이 나오고 있지만, 그동안 선거과정을 주의깊게 지켜보았다면 의외의 결과는 아닐 것이다. 이미 선거 막바지에 야권연대의 과반 의석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징조는 곳곳에서 포착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패착의 원인은 이런 위기의 신호에 아무런 대책을 내놓지 못한 민주당 지도부에 있을 텐데, 사퇴라는 수순 이외에 뾰족한 수습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명숙 민주통합당대표가 사퇴 기자회견을 마친 후 자리를 나서고 있다. (경향신문DB)
어떤 이들은 2002년과 지금을 비교하면서, “그때도 야권이 지리멸렬하다가 막판 뒤집기를 했으니 이번에도 그럴 수 있을 것이다”라고 희망 섞인 위안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번 총선의 패인 중 하나가 정치공학적인 발상에 안주한 야권연대의 자만이라고 지적되고 있는 마당에 이런 낙관은 자기기만 이상의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
물론 겉으로만 본다면, 지금 상황은 2002년과 비슷하다. 당시 이회창 후보에 필적할 만한 여권 후보로 박근혜 위원장이 있고, 다소 우스꽝스러운 비유이지만 ‘여전히’ 지리멸렬한 민주당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는 반복될지언정 결코 동일하게 반복되지 않는 법이다. 이 후보와 박 위원장이 비슷한 위치를 점하고 있지만 같은 사람이 아니듯, 지금 자중지란에 빠져 있는 민주당도 과거의 민주당이 아니다. 유력한 대권후보인 안철수 원장이 ‘제2의 노무현’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지금 당장 안철수를 대체할 만한 ‘다른 노무현’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문재인 당선자가 거론되고 있지만, 국민 경선을 통해 흥행을 도모한다고 하더라도 이번 선거에서 보여준 것처럼 행여 ‘무늬만 경선’을 했다간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후보의 고갈이라기보다, 전망의 부재에 있다는 생각이다. 민주당이 한 번도 수권하지 않은 신생 정당도 아니고, 과거에 정부를 꾸렸던 세력인 만큼 ‘무엇을 위한 재집권’인지에 대한 명분이 필요했는데, 과연 민주당 관계자들이 여기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인지 의심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지지자들조차도 궁금할 수밖에 없는 재집권의 ‘이유’를 과연 민주당은 어떻게 제시했던가? 별 다른 것 없이 ‘이명박 심판’이라는 구호로 일관했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한국처럼 대통령 5년 단임제에 기반을 둔 정치체제에서 심판론은 정권교체기에 등장하는 단골 메뉴에 지나지 않는다. 말 그대로 기본안주라는 뜻이다. 정권교체기가 되면 정부 친화적이었던 여권 지지자들조차도 등을 돌리고 정권심판론자가 되기 마련이다. 따라서 일반화된 정권심판론을 민주당이 일관되게 주장하면 주장할수록, 마치 민주당만이 정권 심판을 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권리를 주장했으면 능력을 보여주어야 한다. ‘제대로’ 정권 심판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신뢰를 줘야 하는데, 총선 결과가 말해주듯이 민주당은 그러지 못했다. ‘국민’이 원했던 것은 이명박 정권에 대한 심판은 물론, 정치권 전체에 대한 심판이었다는 사실을 민주당은 알지 못했다. 그 심판의 대상에 자신들도 포함되어 있다는 진실을 애써 외면했든지, 아니면 전혀 몰랐던 것이다. 전자라면 가능성이라도 있을 것인데, 후자라면 정말 막막해진다.
원죄를 가졌기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오히려 새누리당이 ‘혁신’이라는 코드로 유권자들을 성공적으로 설득해버린 것이다. 이런 새누리당의 행보를 ‘코스프레 정치’라고 비난할 수 있겠지만, 지금까지 행태를 보면 민주당이라고 해서 ‘진보 코스프레’를 하지 않았다고 말하기 어렵다. 정체성의 혼란이 초래한 좌고우면이 민주당을 리더십조차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무능한 집단으로 보이게 만들고, 기득권에 안주하는 구태의연한 기성 정당처럼 느껴지게 만들어버렸다.
박근혜 새누리당 비대위원장이 총선 승리 축하인사를 받자 웃으며 박수 치고 있다. (경향신문DB)
새로운 정치집단의 이미지를 주지 못했다는 것이 이번 총선 패배의 원인이라는 점에서 2002년처럼 야권이 불사조처럼 다시 살아나리라고 낙관하기 어려운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박 위원장이 이끄는 새누리당은 진위야 어떻든 과감한 변화의 제스처를 취하고, 과거와 단절하려는 모습을 보이는 한편, 원칙과 소신을 강조하는 이중전략을 구사함으로써 ‘제대로 하는 보수’에 접근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김형태·문대성 당선자에 대한 출당 논의가 이를 반영한다. 과거 같으면 출당 논의 자체를 야권의 견제에 밀리는 것이라고 판단했을 여권이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안철수로 표상되는 ‘어떤 민심’이 향후 대선 국면에서 중요하게 작동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막말보다도 멘토링을 더 요청하는 이런 변화는 확실히 보수적인 욕망을 보여주는 것이다. 정치인이 막말을 쏟아내기보다 삶의 윤리에 대해 조언해주고, 미래에 대한 책임 있는 발언을 하길 기대하는 것이 이번 총선에서 드러난 ‘민심’의 실체이다. 여야 모두 이 보수의 판 위에서 자신의 가창력을 보여줘야 하는 것이다. 진짜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승자가 누구일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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