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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광 |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얼마 전 뉴욕에서 가야트리 스피박 교수를 만났다. 올해로 70세가 된 스피박 교수는 과거처럼 활기찬 모습을 보여주진 못했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현재 일어나고 있는 다양한 일들에 대한 의견을 자세하게 표명했다. 특히 자신을 탈식민주의 이론가라고 규정하는 일련의 입장에 대해 강한 반대의사를 드러내면서, 자신을 문화정치에 대한 이론가로 불러줄 것을 주문했다. 그가 말하는 문화정치는 현실에 일어나는 문화현상에서 정치적 의미를 찾아내는 작업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작업의 사명을 강조하는 스피박 교수의 태도였다. 최근 아프리카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스피박 교수는 눈에 드러나는 것만을 중심으로 재현되고 있는 현실을 세계의 전부라고 믿는 태도를 경계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까지도 항상 염두에 두는 사유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한국은 올해 두 번의 선거를 치른다. 여기저기에서 자기만이 ‘국민’의 대변인으로 적격이라는 말이 홍수를 이루고 있다.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플라톤은 민주주의에 필연적으로 내장되어 있는 문제점을 지적했는데, 데모스 자신이 통치자이면서 피치자임을 전제할 수밖에 없는 민주주의는 역설을 내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요지였다. 


물론 이런 필연적 역설이 민주주의를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은 아니다. 반민주주의자들은 민주주의의 역설을 민주주의 자체의 부실함으로 간주하고 혐오한다. 이들에게 완벽한 정치체는 지도자와 대중이 단결해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하나의 유기체 같은 것이어야 한다. 이런 유기체의 활동을 가로막는 이견은 몸을 병들게 만드는 균이나 바이러스와 같다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다. 균과 바이러스를 제거해서 병을 낫게 하듯이, 이런 이견들을 없애버리면 사회도 건강해질 것이라는 생각이 이들을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의 교훈은 이런 발상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파시즘의 발호는 현대 정치철학의 기원을 이루는 원초적 트라우마이기도 하다. 벤야민이나 아렌트 같은 좌파는 물론이고, 벌린부터 스트라우스, 심지어 하이예크에 이르기까지 파시즘의 경험은 우파에게도 중요한 정치적 기제였다. 파시즘을 저지할 수 있는 정치적 방안에 대한 이들의 논의는 서구 문명의 파국을 경험한 이들이 내놓을 수 있는 최선의 방책들이었다.


스피박 교수의 이야기는 이런 문제의식과 일정하게 관련을 갖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재현하는 것이야말로 대의정치의 본령이라면, 소홀하게 취급당하는 몫 없는 자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정치의 계절에 필요한 것은 이런 목소리에 귀기울일 수 있는 태도이다. 지금까지 훌륭한 정치인은 자기 주장을 강력하게 표명하는 웅변가였다. 그러나 최근 들어 정치인의 소통 코드는 남의 주장을 잘 들어주는 쪽으로 바뀌었다. 근대 이후 어떤 독재자도 민주주의 자체를 거부할 수는 없다. 최소한 민주주의인 척은 해야 하는 일이 벌어진다. 누구도 남의 주장을 억압하면서 근대인을 자처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굽힘없이 말했을 때 돌아올 불이익을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야말로 표현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다. 스피박 교수가 재현되지 않는 목소리에 대한 배려와 더불어서 강조했던 민주주의 교육은 이런 윤리에 대한 일깨움을 전제한다고 볼 수 있다.


스피박 교수를 만난 뉴욕은 말 그대로 코스모폴리탄들에게 동경의 도시다. 어떻게 생각하면 더럽기 짝이 없는 구석도 있고, 불평등과 모순이 넘쳐나는 대도시이지만, 뉴욕이 주는 매력은 바로 다양성의 용광로라는 정체성을 지키기 때문에 가능할 것이다. 이 매력의 성격을 논하기 전에, 이 도시가 유지될 수 있는 힘을 생각해봐야 한다. 바로 어떤 주장도 경청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합의가 깔려 있기 때문에 이토록 다양한 군상들이 뒤섞여 있음에도 인상적인 조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물론 이런 다양성은 대도시의 양상을 보여주는 특성에 불과하다. 문제는 이 양상을 만들어내는 대도시의 개방성일 것이다. 편의를 제공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여기에서 작동한다. 이 원칙은 눈에 보이지 않는, 몫 없는 자들의 목소리를 들어주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보이지 않는 이들을 재현해주는 것이야말로 스피박 교수가 말하는 것처럼 ‘좀 더 배운 사람들’의 역할일 것이고, 문화정치의 본령일 것이다. 


모든 것은 변한다. 학창 시절에 열심히 읽었던 스피박 교수의 저작들도 이제는 그의 육신만큼이나 늙은 것처럼 보인다. 게다가 그가 전제하는 ‘들어주는 사람’에 대해 엘리트주의의 혐의를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학술대회에서 얻은 낡은 가방에 책과 일용품을 잔뜩 싸들고 자리를 뜨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 늙음이 노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월의 통찰을 보여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자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민주주의의 원리, 이것이야말로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고 우리 모두에게 남겨진 지혜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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