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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아씨가 ‘속죄’의 마음으로 썼다는 자전적 에세이가 파란을 일으키고 있다. 책에서 직접 거론된 당사자들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일축하고 있지만, 책은 출간 즉시 날개 돋친 듯이 팔려나가고 있다.
이 현상을 두고 여러 가지 해석을 제시할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짚고 넘어가야할 것은 이제 신정아씨의 ‘고백’은 진실의 문제를 떠나서 엔터테인먼트 차원으로 넘어갔다는 사실이다.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왜 이런 일들이 반복되는 걸까?


신정아씨의 책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논란은 정치를 예능 프로그램과 동일선상에서 바라보는 한국 사회의 특징과 무관하지 않다. 경제를 중심에 놓고 정치를 귀찮은 것이라고 치부하는 사회적 분위기에서 파생되어 나온 것이다.
정치를 아무리 억압해도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는 사라지지 않는 법이다. 정치 집단들이 대의민주주의라는 ‘기교’를 적절하게 수행하지 못할 때, 불만의 목소리는 터져 나온다.


물론 한국처럼 정치에 대한 불쾌감이 팽배한 사회에서 이런 목소리는 결코 정치색을 띠고 자기주장을 펼칠 수 없다. 가장 정치적인 주장이 가장 정치적이지 않은 모습으로 출몰하는 것이 한국 사회의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따라서 ‘강남좌파’와 ‘분당우파’라는 대립구도를 만들어서 ‘낡은 이분법’을 도입하려는 시도보다도 오히려 ‘나는 가수다’를 둘러싼 공정성 논란이 훨씬 더 정치적인 효과를 초래한다. 정치라는 것이 대중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문제라고 본다면 말이다.

한국 사회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는 이처럼 정치색을 띠지 못하고 언제나 엔터테인먼트의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다. 정치성이 필수적으로 선정성과 결합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하게 작용하는 것이 ‘억압의 가설’이다. 미지의 ‘파워엘리트집단’이 대다수 ‘국민’을 억압하고 있다는 생각이 이런 가설을 떠받치고 있는 중요한 심리 기제이다.

이와 같은 상상은 은밀한 쾌락을 몇몇 소수들이 나눠가지는 ‘룸살롱 정치’라는 현실을 통해 진실성을 획득한다. 공적인 문제를 사적인 관계를 통해 해결하는 방식이 부의 축적과 연결되었던 것이 한국의 근대화 과정이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이런 가설이 지금까지 강고한 설득력을 유지하는 비결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한국 사회에서 억압되고 있는 정치가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라는 사실을 감안했을 때, 신정아씨의 책이 불러일으킨 파장은 특별히 이상한 일이라고 보기 어렵다. 아무나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를 할 수 없다면, 결국 누군가 나서서 민주주의의 원칙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폭로’해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무엇인가를 까발리려고 한다면, 내부 사정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파워엘리트집단에 한때 가담했던 이들만이 이 폭로를 수행할 자격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한국에서 정치적인 폭로는 언제나 내부고발의 형식을 채택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정치적 폭로가 내부고발 형식을 띠는 한 민주주의의 문제는 개인의 양심이라는 한계에 묶여 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퍼포먼스를 목도하는 대중들은 일시적으로 재미있을 수 있겠지만, 그 행위가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동참할 수 있는 길은 원천적으로 봉쇄당한다. 폭로의 행위가 정치적인 의미로 대중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유가 이 때문일 것이다.


신정아씨는 ‘사기꾼’에서 ‘내부고발자’로 거듭나면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그러나 그를 둘러싼 해프닝이 제기하고 있는 문제들은 여전히 해답을 찾지 못한 채 떠돌고 있을 뿐이다.


2011.3.26. 경향신문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3252020105&code=990000&s_code=ao0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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