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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 11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문재인 정부는 ‘촛불혁명’을 통해 탄생했다. 그 혁명은 80%에 가까운 압도적 다수의 국민들이 지지했고, 지금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집권 초반 지지율도 그쯤 된다. 당연하게도 그 지지는 콘크리트처럼 단단할 수 없고, 다양한 방향에서 도전을 받을 수밖에 없다. 벌써 ‘범진보’ 진영 안에서부터 균열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참여정부 때부터 보아왔던 익숙한 풍경이라 새삼스럽지는 않지만, 사실은 바로 그래서 사소하게 여길 문제는 아니다.

노동운동이 먼저 총파업을 감행하며 도전했다. 촛불혁명에 조직적으로 가장 앞장섰던 세력으로서 이 정부의 출범에 대해 가진 나름의 지분을 정치적으로 실현하겠단다. 그러면서 각종 노동 현안을 해결하기 위한 획기적 실마리가 마련되지 않는다면 문재인 정부는 언제든지 격한 투쟁의 상대가 될 수밖에 없다고 경고장을 날렸다.

여성운동의 견제도 만만치 않다. 양성평등의 실현 없는 민주주의는 사이비 민주주의라며 터무니없이 마초적인 여성관을 공개적으로 드러낸 적이 있는 탁현민 청와대 행정관의 해임을 강하게 압박하고 있다.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되겠다고 공언까지 했던 문 대통령으로서는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없는 정치적 압력이다.

문 대통령의 열성 지지자들은 그런 도전과 견제를 마뜩잖아 한다. 그렇지 않아도 사방팔방에서 적들의 공격에 시달리고 있는데, 힘이 되어야 마땅할 것 같은 세력들이 그 적들과 함께하거나 최소한 그 적들을 돕고 있단다. 그들 중 일부는 스스로를 ‘신좌파’니 어쩌니 하며 노동운동이나 여성운동과 날카롭게 구분 짓고는 그 운동들에 대한 서운함을 날선 적대의 언어로 표출하기도 한다.

이런 종류의 균열을 무턱대고 비난하면서 억지 연대를 강요하는 방식으로 문제에 접근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그것을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서로 다른 ‘정의’의 관점들이 충돌한 결과라고 이해할 수 있다. 모두가 정당한 정의의 요구들을 제기하고 있지만, 그 초점과 차원이 얼마간 어긋나서 불가피하게 생길 수밖에 없는, 감내해야 할 불협화음 정도로 말이다.

극심한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양극화의 현실을 생각할 때, 비정규직 철폐 같은 좀 더 평등한 ‘분배 정의’에 대한 요구만큼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민주정부가 민감하게 다루어야 할 문제는 없어 보인다. 오랜 여성 억압의 역사를 생각할 때, 양성평등의 이상이 단순히 형식적인 기회균등의 차원을 넘어 실질적으로, 곧 제도적으로 또 문화적으로 관철되고 실천되어야 한다는 ‘젠더 정의’의 요구도 최소한 그만큼은 절박해 보인다. 하지만 그런 정의의 요구들은 단지 민주주의라는 정치적 지반 위에서만 실현가능할 것이기에, 우선 그 지반을 공고히 하고 심화시키는 ‘민주주의적 정의’부터 실현해야 한다는 주장을 물리치기도 쉽지 않다.

긴장과 갈등 자체를 회피할 방법은 없다. 유일하게 올바른 해법도 없다. 차이를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각시키고 고무하기까지 하되 그것이 궁극적으로는 공동의 지반을 강화시킬 수 있는, 말하자면 ‘함께 또 따로’의 변증법이 필요할 따름이다. 여기서 변증법이라는 표현은 ‘대화를 통한 진리 발견술’이라는 말의 본래적 의미를 염두에 두고서 붙인 것이다. 그러니까 진정성 있는 소통만이 유일한 해법이다. 물론 다음과 같은 전제가 충족되어야 한다.

우선 ‘공동선’에 대한 지향이다. 그 어떤 정의의 요구도 ‘모두에게 좋은 것’의 우선성을 넘어서려 해서는 안된다. 우리의 민주공화국은 바로 그 공동선의 구현체로 이해되어야 하며, 모든 정의에 대한 요구는 그 공동선의 요구로 번역되고 또 그를 통해 정당화될 수 있어야 한다. 상호성과 보편성이라는 기준에 따른 검증이 필요하다.

다음으로 ‘오류 가능주의’의 수용이다. 사람들이 지닌 신념과 열정은 삶과 사회 진보의 동력이다. 그래서 공동선을 지향해야 한답시고 스스로가 지닌 과학적, 정치적, 도덕적 인식들을 무턱대고 상대화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러한 인식들이 절대적 진리는 아니며 언제든지 ‘틀릴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다는 점만은 인정해야 한다. 그래야만 ‘남’과 참된 소통을 할 수 있다.

민주주의적 정의 없이는 분배 정의도, 젠더 정의도 실현 불가능하겠지만, 그런 요구들을 무시하는 민주주의 또한 성립할 수 없다.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에서는 진보를 자처하는 이들조차 큰 틀에서 같은 편이어야 할 사람들과도 이견과 차이를 조율하며 소통하는 데 아직 전혀 익숙하지 못하다.

지금 다들 자기만의 정의를 내세우며 서로 시퍼렇게 날만 세우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를 되돌아볼 일이다.

장은주 | 영산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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