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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 3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북한의 리용호 외무상은 최근 유엔에서 행한 연설에서 ‘국제적 정의’라는 개념을 통해 자국의 핵실험을 정당화했다. 미국의 횡포 때문에 유엔이 추구하는 정의가 실현되지 않고 있어서 자위를 위해 핵개발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고, 그것은 철저하게 정의의 원칙에 부합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지금 국제사회는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반항한다고 하여 피해자에게 제재를 가하는 만고의 부정의”를 저지르고 있다고 항변했다.

유엔이 상임이사회에 속한 강대국들의 입김에 지나치게 휘둘리고 있어 개혁이 필요하다거나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부당하다는 따위에 대한 지적이야 옳다. 그러나 북한이 수차례 핵실험을 강행하며 한반도에 전쟁 위기를 고조시키고 있는 현 상황은 어떤 경우에도 정의로 포장될 수 없다. 북한은 지금 김정은 3대 세습정권을 유지해야 한다는 편집증적인 강박 때문에 한반도 전체 인민들의 생명과 안녕을 걸고 위험한 도박을 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피해자 코스프레가 참으로 가증스럽다.

그러나 놀랍게도 우리 사회에서도 미국에 당당하게 맞서는 북한의 저 결기만은 높이 사야 한다는 이들이 의외로 많은 듯하다. 특별히 ‘종북적’이어서라기보다는 강한 민족주의적 정서 때문일 터다.

적잖은 시민들이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가 미국의 압박에 순응적인 행태밖에 보이지 못한다며 실망감을 토로하고 있는데, 여기에도 우발적 전쟁에 대한 걱정만큼이나 민족적 자존감의 손상에 대한 안타까움이 크게 작용하고 있지 않을까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민족주의적 정서 이면에는 강한 서구중심주의가 숨어있다. 늘 민족 자주성을 강조하는 북한이 내세우는 저 국제적 정의에 대한 관념은 개별 국가의 배타적 주권성의 이념을 인정하고 고취했던 17세기의 베스트팔렌 조약에 따른 서구 중심의 근대적 국제 질서의 산물이다. 우리 사회의 많은 성원들이 통일을 지상과제로 삼을 때 당연시하고 있는 전제, 곧 하나의 민족은 하나의 국가를 이루어야 한다는 이상도 사실은 애초 같은 뿌리에서 나와 서구의 근대 역사 속에서 발전한 것이다. 이런 인식틀은 이제 버릴 때가 되었다.

오늘날 새롭게 확립되어야 할 지구적 정의에 대한 이상은 더 이상 개별 국가의 절대적 주권성의 원칙 위에 서서는 안된다. 주권은 여전히 존중되어야 하지만, 전 세계 만민의 자유와 인권을 상호적으로 보장할 수 있는 국제 질서의 확립과 작동을 위해 일정하게 제약되고 순치되어야 한다. 북한같이 자국민의 인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국가의 주권 행사를 무턱대고 정당하다고 인정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 정의의 관점에 서야 미국 같은 강대국들의 패권 추구도 유엔 같은 국제기구와 국제법의 틀 안에 더 잘 묶어둘 수 있다.

이때 평화는 정의의 절대적 전제다. 아니, 평화야말로 가장 원초적인 정의다. 그 어느 국가나 민족도 특정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전쟁을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된다. 아무리 목적과 명분이 그럴 듯하다 해도, 한반도에 사는 수천만의 생명과 안녕을 담보로 북한은 핵실험을 하고 미국은 그에 맞서 군사적 응징을 위협하는 지금의 상황은 그 자체로 심각한 인권 침해요, 거대한 불의가 아닐 수 없다.

하루빨리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야 한다. 북한에 대해 전쟁도 불사해야 한다거나 우리도 핵무장을 해야 한다는 따위의 주장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 그런 주장도 결국 남한만을 대상으로 한 변형된 민족주의의 발로로서, 정의롭지도 못하고 현실적이지도 않다. 이제 우리는 무엇보다도 한반도 문제에 대한 그동안의 인식틀을 근본적으로 성찰하면서 항구적인 한반도 평화체제를 만들어내기 위한 새로운 접근법을 발전시켜야 한다.

하나의 민족은 반드시 하나의 국가를 형성해야 한다는 이상부터 의심하자. 평화가 민족이나 통일 같은 가치보다 우선해야 함도 분명히 하자. 민족통일에 대한 집착이 오히려 통일도 평화도 불가능하게 만들지는 않았는지 의심해 봐야 한다.

그 평화체제의 출발점은, 사실은 이미 현실이지만 부정되고 있는, 한반도 양국체제를 공식화하는 데 있을 것이다. 북한을 하나의 완전한 독립 국가로 인정하고, 우리가 앞장서 북·미가 평화협정을 맺고 수교를 하게 도와야 한다. 내부적으로는 우리 헌법의 비현실적인 한반도 영토 조항부터 삭제하면서 북한도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하도록 주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나의 민족이 두 개의 국가로 나뉘어 평화로운 외교 관계를 맺는 체제는, 조금 낯설지는 모르지만 무슨 역사적 모순은 아니며, 오히려 지금의 교착 상태를 풀 수 있는 아마도 유일한 해결책일 것이다.

<장은주 | 와이즈유(영산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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