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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민주적인 정당성을 가진 정부라도 쉽게 결정해서는 안되는 국가적 의제들이 있다. 특히 국가 전체의 운명과 관련되거나 그 결정이 미래 세대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사안들이 그렇다. 신고리 원전 5·6호기 건설을 계속할 것인지의 문제 같은 것이 전형적인 예다. 이런 문제에 대한 결정의 정당성은 통상적인 사안들과는 다른 차원에서 확보될 필요가 있다.

이 문제를 단순히 전문가들의 결정에 맡길 수는 없다. 원전 관련 전문가들이 자신들의 밥그릇 챙기기가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사안을 판단하리라는 보장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설사 그들이 사적 이해관계를 넘어서는 일이 가능하다고 해도, 문제되는 사안은 원전 관련 전문가들이 전혀 그 전문성을 주장할 수 없는 사회적·환경적 차원의 문제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 문제들에 대해서는 그들로서는 기껏해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근거로 도덕의 상대성을 주장하는 식의 억지만 펼칠 수 있을 것이다. 도대체 이런 사안과 관련된 전문가가 누구인지는 전혀 분명하지 않다.

그런 점에서 정부가 ‘시민배심원제’를 통해 결정을 내리기로 한 것은 전적으로 정당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선거는 과두정에 어울리고 민주주의의 수단으로는 추첨이 맞다고 했다. 성별, 연령별, 지역별 균형 등을 고려한 제비뽑기에 의해 선출될 시민배심원단들은 기본적으로 원자력 산업과 무관하다. 그래서 그들은 특별한 사적 이익이 아니라 그야말로 국가공동체 전체의 공동선을 위해 가장 좋은 선택지가 무엇인지에 대해 최선의 판단을 내릴 가능성을 더 크게 갖고 있다. 게다가 이 시민배심원단에서는 인구를 구성하고 있는 다양한 계층과 집단의 표준적인 대표자들, 곧 농부, 노동자, 자영업자, 사무직원, 전업주부, 실업자 청년 등과 같은 보통의 시민들이 왜곡 없이 자신들을 대변할 수 있다. 그리하여 이 방식은 가장 공정하고 민주적으로 우리 사회 전체의 합리적 민의를 최소한 아주 근사적으로 확인할 수 있게 한다.

혹시 너무도 평범한 시민들이라 사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그릇된 판단을 하지 않을까? 시민배심원단은 단순히 사안에 대해 의견을 제출하는 역할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심층적인 학습을 하고 다른 배심원들이나 일반 시민들의 의견을 폭넓게 듣고 토론을 한 뒤 숙고된 결정을 내릴 것이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최초의 의견을 바꿀 수도 있고, 아무튼 가장 그럴듯해 보이는 안을 선택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판단의 합리성에도 큰 신뢰를 보낼 수 있다. 더구나 다양한 연령과 계층과 집단의 성원들로 구성된 시민배심원단은 폐쇄적 전문가 집단보다 사안을 훨씬 더 다각도로 보면서 창의적인 해법을 제시할 수도 있다. 진리 발견의 가능성을 높여주는 민주주의의 이 인식론적 우월성은 다양한 사례와 경험에서 충분히 입증되었다.

그런데도 이번의 정부 결정을 두고 도전이 만만찮다. 시민배심원제를 도입하기로 한 데 대해 사회적 논의 과정이 충분치 않았다고 문제제기하는 정도를 넘어 위법적이라고 시비를 걸기도 한다. 운영주체인 공론화위원회와 정부 사이에서도 시민배심원단이 심의만 해야 하는지 아니면 결정의 책임도 함께 져야 하는지의 문제에 대해서 얼마간 혼선을 보였다. 마침내 공론화위원회 스스로 결정에 따른 부담을 피하려는 듯 시민배심원단 대신에 ‘시민참여단’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로 했단다. 그러나 시민배심원제 자체를 포기하면 안된다. 오히려 이번 기회에 이런 민주적 심의 과정을 더 확고하게 제도화하고 뿌리내리게 할 필요가 있다.

개헌이나 선거제도 개편 같은 사안들도 보자. 문재인 대통령은 내년 지방선거 때 개헌을 하겠다고 약속했지만, 복잡한 이해관계를 가진 우리 정치권이 권력구조 문제에 대해 쉽게 합의에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사실은 개헌보다 더 시급하고 중요한 선거제도 개편과 관련해서도, 정치권은 얼마 전 기득권 정당들을 중심으로 선관위의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 권고를 무시하고 현행 소선거구제를 약간 손보는 데서 멈추고 만 선택을 한 바 있다. 이런 사안들에 대해서는 단지 시민배심원단의 공정한 숙의 같은 것을 거침으로써만 모든 정치세력이 합의할 수 있고 민주적 정당성도 갖는 안을 도출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런 차원의 문제들에까지 시민배심원단을 확대하고 상설화할 필요가 있다. 그걸 ‘시민의회’라고 부르자. 이 시민의회는 시민적 주권성을 좀 더 완전하게 실현할 수 있는 결정적 통로를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시민의회를 도입하는 것이야말로 촛불혁명을 비로소 ‘혁명’이게 할 참된 성취 중 하나가 아니겠는가.

장은주 | 영산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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