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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년 4월 강화도를 점령했던 미국 함대가 물러나자, 당대의 실권자 대원군은 서울 보신각 앞을 비롯한 전국 요처에 척화비를 세우게 했다.           

앞면에는 “양이(洋夷)가 침범하는데 맞서 싸우지 않으면 어울리는 것이라, 그들과 어울리자고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짓이다(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라는 문구를, 뒷면에는 “우리 만대 자손에게 경계한다.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우다(戒我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라는 문구를 새겼다. 굳이 병인, 신미의 두 간지(干支)를 명기한 것은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를 잊지 말라는 의미였다. 양요(洋擾)는 양이가 일으킨 난리로, 요(擾)는 난(亂)보다 규모가 작은 국지적 난리를 말한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당대의 조선 사람 절대다수는 양이가 보통의 인간과는 다르게 생긴 괴상한 종족이라는 사실은 알았으나, 그들이 어디에 살며 어떤 길로 조선에까지 왔는지는 알지 못했다. 병인년에 난리를 일으킨 양이와 신미년에 난리를 일으킨 양이가 서로 수만 리 떨어진 곳에 사는 자들이라는 사실도 몰랐다. 17세기 중엽 네덜란드인 벨테브레와 하멜 일행 등이 표류해 왔을 때, 조선인들은 그들을 남만인(南蠻人)이라 불렀다.          

조선 사람들의 세계에 관한 지식 안에서, 그들 본국의 위치는 지금의 동남아시아와 남태평양 일대였다. 조선인들이 양이라는 말을 쓰기 시작한 것은 중국이 아편전쟁을 겪은 뒤였다.

1882년 미국과 통상조약을 맺은 조선 정부는 척화비를 모두 철거했다. 이 뒤로도 한동안 양이를 배척하자는 목소리는 높았으나 서서히 사그라졌고, 양이에게서 유래한 물건들은 조선 사람들의 일상생활 공간 안으로 빠르게 침투했다. 양은 양철 양재기 양동이 양초 옥양목 양복 양장 양화 양옥 양식 양악 양의 등 앞에 ‘양’자가 붙는 사물과 사상(事象)들이 하루하루 늘어났다. 더불어 양이라는 단어는 양인(洋人)이라는 단어로 대체됐다. ‘양’은 ‘신(新)’과 바꿔도 무방한 글자였고, 선각자, 부자, 배운 사람이 남보다 먼저 채택하고 사용하는 것들이었다.        

앞에 ‘양’자가 붙는 물건들을 소유하고 사용하는 것은 보통사람들의 보편적 욕망이 되었으며, 이윽고 표준의 자리를 차지했다. 반면 우리 자신에게서 유래한 것들 중 상당수가 한복 한옥 한의학 국악 등 특별히 그 정체를 표시해야 하는 지위로 밀려났다.

물론 ‘양’은 동양이나 남양, 북양이 아니라 서양이다. 그런데 서양은 어디이며, 서양인은 누구인가? 서양에 대비되는 지역은 또 어디인가? 동양 말고 남양이나 북양이 있는가? 지도 위에 서양을 표시해 보라고 하면 아마 대다수는 당황할 것이다. 이집트, 세네갈, 우즈베키스탄, 파키스탄, 페루, 볼리비아, 스리랑카 중 동양 국가는 어디이고 서양 국가는 또 어디인가? 원주민계 미국인, 유럽계 미국인,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모두 같은 나라 사람이지만 그들 모두가 서양인인가?

몇 해 전 어떤 연구기관 대표가 한·중·일 삼국의 공통 관심사에 관해 논의하는 정례 심포지엄을 구상하고 ‘동양 삼국 연례 학술대회’라는 이름을 붙인 뒤 일본과 중국의 관련 연구기관에 참여 의향을 물었다. 일본 측에서는 별 이견을 달지 않았으나, 중국 측으로부터는 “중국은 동양 국가가 아닙니다”라는 냉랭한 대답을 들었다. 그는 초청만 해 주면 군말 없이 오던 중국인들이 배가 불러 거만해졌다고 불평했으나, 사실 중국이라는 국호 자체가 동서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관념의 소산이다.

우리말로는 모두 바다이지만 해(海)는 물로 가득 찬 광활한 공간을, 양(洋)은 땅끝을 의미한다. 중국인들이 동양과 서양을 나누어 보기 시작한 것은 기원후 13세기 무렵부터의 일인데, 세계에 대한 지식이 확장됨에 따라 그 구분선도 여러 차례 바뀌었으나 동양과 서양을 나누는 기준은 언제나 중앙, 즉 중국이었다. 그들에게는 서역 너머에 있는 땅이 서양이었고, 동쪽 바다 건너편에 있는 땅이 동양이었다. 그들에게는 조선도 동양에 속했으나, 조선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중국적 화이관에서 ‘양’은 오랑캐의 땅이었다. 조선 사람들의 상상 안에서 동양은 중국 동남해안 동쪽에 있었다.

조선을 동양 제국의 일원으로 끌어들인 것은 일본이었다. 1876년, 조일수호조규에 서명한 일본 전권대신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는 조선과 일본이 아세아주 동양에 함께 있으니 서로 우의를 다지자는 내용의 서신을 첨부했다. 조선의 유교 지식인들에게는 이 내용이 분명 마뜩잖았을 것이나, 한국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이 커지는 만큼 일본인들의 세계관이 지배하는 영역도 넓어졌다.        

19세기 말부터 세계를 동양과 서양의 둘로 나누어 인식하고, 우리 스스로를 동양의 일원으로 배치하며, 서양과 대비하여 동양의 정체성을 재규정하는 태도가 일반화했다.

동양과 서양은 정밀하게 작도된 세계지도 위에 명료하게 경계를 그릴 수 있는 구체적 권역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 특히 자칭 동양인들의 의식 안에 모호하게 그려진 심상 지리 공간일 뿐이다. 서양은 지구의 반이 아니라 기독교 문명의 역사를 가진 백인들이 지배하는 땅이며, 현대 문명의 중심이자 인류 진보의 모범을 표상하는 기호일 뿐이다.        

서양과 동양은 공간 개념이라기보다는 역사적 시간 개념에 더 가깝다. 게다가 이 마음속의 공간은 지구의 실제 지표 면적보다 훨씬 좁다. 누락된 권역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이해하려는 의지가 작동하지 않는다.

우리는 지난 백 년 넘는 세월 동안 위치도 불명확한 서양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누구인지 불분명한 서양인에게 배우는 것만을 지상과제로 생각하며 살아왔다. 조선왕조 500년을 지배한 게 모화사상이라면, 근현대 150년을 지배한 건 서양숭배사상이다. 이제는 동양과 서양이라는 이분법을 폐기해야 하지 않을까? 다채로운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고 전 세계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대하는 것이, 우리가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발전하는 길일 것이다.

<전우용 |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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