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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자금 수사가 정점을 달리던 2003년 2월 일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언론 인터뷰에서 “대선자금 수사가 기업인에 대한 직접적인 처벌로 진행되지 않았으면 하는 희망을 갖고 있다”고 했다. 검찰로서는 ‘수사 가이드라인’이나 마찬가지다. 안대희 대검 중수부장은 다음날 출근길에 기자들과 만나 “노 대통령 발언은 말 그대로 희망사항 아닌가”라고 받았다. 과거 같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정치권력에 길들여진 검찰이 대통령 발언에 정면으로 반기를 드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
살아 있는 권력을 상대로 한 수사는 예나 지금이나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2002년 대선자금 수사가 그랬다. 청와대의 가이드라인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노 대통령은 “내가 한나라당 불법 대선자금의 10분의 1을 더 썼다면 그만두겠다”고 했다. 이 발언이 나온 뒤 수사팀은 발칵 뒤집혔다. 격앙된 반응도 쏟아졌다. 하지만 정작 수사결과는 청와대 가이드라인과 전혀 달랐다. 당시 수사결과 발표를 보면 한나라당과 노 대통령 캠프의 불법 정치자금 액수가 823억원과 113억원으로 10분의 1을 훨씬 넘겼다. 송광수 전 총장은 몇년 뒤 대학 강연에서 “(노 대통령의 말이 나온 뒤) 더 눈에 불을 켜고 찾았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자 대통령 측근들 사이에 ‘검찰이 하늘 무서운 줄 모른다’ ‘손을 봐야 한다’는 말이 나왔다”고 했다.
이후 12년이 흘렀다. 검찰이 오랜만에 살아 있는 권력과 다시 맞닥뜨렸다. 청와대의 이른바 ‘십상시 파문’이 수사 대상에 올랐다. 구중궁궐의 권력암투를 수사해야 하는 민감한 소재다. 청와대의 좌불안석은 어쩌면 당연한 얘기다. 박근혜 대통령의 가이드라인이 쏟아진다. 과거 노 전 대통령과는 비교할 바도 아니다. 박 대통령은 수사가 시작되기도 전에 십상시 문건은 찌라시라고 규정했다. 문건 유출은 국기문란이요, 일부 몰지각한 참모들의 자작극이라고 했다. 하지만 검찰은 조용했다. 대통령과 맞짱을 뜨자던 안 전 중수부장의 호기를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검찰 반응은 실망 그 자체였다. 수사결과는 더 참혹하다. 박 대통령의 가이드라인 그대로다. 마치 짜고 치는 고스톱 판과 다를 게 없다. 수사팀 관계자는 “그래도 ‘7인회의 자작극’이라고 한 청와대 감찰 결과를 무너뜨린 것은 나름 성과”라고 자평했다고 한다. 듣기에도 민망할 정도다.
16일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 청사 앞 국기 게양대에 걸린 태극기와 검찰 깃발이 세찬 바람에 휘날리고 있다. (출처 : 경향DB)
닮은꼴 두 사건에 대한 평가는 전혀 다르다. 2002년 대선자금 수사는 시민들이 대검 청사에 수박과 떡을 실어 나를 정도로 국민적 지지를 받았다. 정치권력에 굴하지 않고 검찰권을 곧추세운 몇 안되는 사건이다. 하지만 정윤회 문건 파동 수사는 정반대다. 김진태 총장은 사석에서 “나름 최선을 다한 수사”라고 했다. 실력부족을 탓한다면 모르지만 청부수사라는 비난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국민의 평가는 냉정하다. 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국민의 59%가 “검찰 수사결과를 믿지 못하겠다”고 답했다. 김 총장 취임 후 검찰에 대한 기대감이 컸던 게 사실이다. 이명박 정부 5년간 권력에 굴종한 정치검찰의 민낯을 고스란히 보여준 데 대한 반작용도 컸다. 김 총장은 2년 임기의 5부 능선을 넘었다. 하지만 검찰에 대한 국민여론은 여전히 싸늘하다.
최근 청와대 민정특보로 이명재 전 검찰총장이 임명됐다. 그는 검찰 특수통의 ‘좌장’이다. 검찰을 떠난 지 13년이 됐지만 아직도 따르는 후배들이 많다. 이 특보는 김 총장과도 각별한 사이다. 김 총장은 존경하는 선배로 이 특보를 꼽는다. 이 특보가 DJ 정권 말기 검찰총장으로 돌아왔을 당시 수족처럼 일을 믿고 맡겼던 검사가 김 총장이다. 당시 청와대의 압력을 뿌리치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차남 김홍업씨를 구속 수사할 수 있었던 것도 이 특보가 버티고 있어 가능했던 일이다. 청와대와 검찰 수뇌부에 ‘검증된’ 특수통이 나란히 자리를 차고 앉은 것은 검찰사에 전례가 없는 일이다. 이 특보가 뒤늦게 청와대의 요청을 받아들인 이유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이 특보나 김 총장 모두 누릴 만큼 누린 사람들이다. 이 특보가 총장에 임명된 뒤 “항상 안주머니에 사표를 넣고 다녔다”고 한 일화는 꽤 유명하다. 김 총장도 “하루를 했더라도 총장 아니겠느냐”고 했다. 검찰 조직에서 두 사람에게 거는 기대가 남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간 검찰에서 검사다운 검사를 구경한 지 꽤 오래됐다. 국민들은 대선자금 수사 당시의 ‘국민검찰’에 목말라 있다. 둘에게 주어진 시간은 딱 1년이다. 검찰로 봐도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지 모른다.
박문규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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