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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

[정동칼럼]신뢰의 힘

opinionX 2015. 2. 3. 21:00

지난해 안식년으로 미국에 머물면서 접한 가장 충격적인 현지 소식은 디트로이트에서 일하는 한 내과 의사의 가짜 암 환자 치료 사건이었다. 이 의사는 자신의 환자들에게, 심지어는 임종 직전의 환자들에게까지 필요 없는 항암치료를 해 우리 돈으로 100억원에 이르는 건강보험 진료비를 부당하게 받아 챙겼다고 한다. 더욱 경악스러운 것은 이 의사에게 항암치료를 받은 환자의 상당수가 암이 없는 건강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이다. 건강한 사람들에게 암이 있다고 속여 항암치료를 했고, 그중 일부는 치료 때문에 사망했다.

그런데 이 사건에 대한 미국 현지의 반응이 의외였다. 미국 현지 언론은 이 의사를 ‘죽음의 의사’로 지칭하며 관련 소식을 전하면서도, 이 사건을 해당 의사 개인의 문제 이상으로 확대하지 않았다. 주위 사람들에게 이 사건에 대해 물어봐도, 이런 사건이 있었는지조차 모르거나, 알더라도 담담한 반응이었다. 만약 우리나라에서 이런 사건이 발생했다면, 의료계에 대한 공분으로 한동안 벌집 쑤셔놓은 듯했을 것이다.

어떻게 이런 경악스러운 사건을 접하고도 냉정을 잃지 않을 수 있을까. 그 이유는 국민이 의료계를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있기 때문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미국은 국민의 건강보장에 실패한 나라다. 그럼에도 의사와 환자 간의 두터운 신뢰 관계만큼은 부러울 정도다. 이런 신뢰 형성에는 여러 요인이 영향을 미쳤지만, 의사와 환자를 맺어주는 제도의 영향이 가장 크다.

미국은 우리나라와 달리, 의사 진찰에 대해 주는 진료비와 그 외 검사, 투약, 병원시설·인력 이용에 대해 주는 진료비가 구분되어 있다. 의사와 환자 간의 금전적 거래는 환자가 병원에 방문했을 때 내는 얼마간의 본인부담금으로 끝난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다. 온갖 곳에서 고액의 청구서들이 날아온다. 이때 환자를 도와주는 사람이 바로 의사다. 보험사에 전화를 걸고 편지를 써서, 환자의 부담을 줄여주기 위한 협상을 벌인다. 미국에서 만난 한 한국인 의사는 “이곳 환자들은 의사를 자신을 도와주는 고마운 사람으로 믿고 따른다”고 전한다.

미국에서는 환자의 이익을 옹호하는 것이 의사의 금전적 이익과 충돌하지 않도록 제도가 만들어져 있다.러나 우리나라는 정반대다. 진료비가 하나로 뭉쳐 있는 데다, 의사 진찰로 얻는 이득은 적고, 그 외 온갖 검사·처치 등에서 얻는 이득은 많다. 환자의 이익을 옹호하다가는 당장에 금전적 손실을 감수해야 한다. 신뢰 유발형 제도가 아닌, 신뢰 훼손형 제도인 셈이다.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의사와 환자 간의 신뢰가 형성되기 힘든 중요한 이유이다.

의사와 환자 간의 신뢰 부재로 인한 폐해는 크다. 양측이 피차 피곤하고 불편하다. 특정 개인의 일탈도 전체의 문제로 비화되기 일쑤다. 환자는 의사를 믿지 못해 여러 병원을 떠돌다, 돈도 버리고 몸도 상하곤 한다. 의사는 환자를 믿지 못해 방어 진료를 하느라, 필요 없는 검사를 하고, 꼭 필요한 처치도 기피하곤 한다. 양자가 모두 피해자이지만, 그 피해의 대부분은 상대적 약자인 환자 몫이 되기 십상이다.

새누리당 이주영 의원이 원내대표 출마 선언을 하면서 모토로 내 건 단어 중 하나는 '신뢰'였다. (출처 : 경향DB)


신뢰 부재의 폐해는 비단 의료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우리나라의 위기는 신뢰의 위기’라는 진단도 이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법과 질서에 소홀한 국민성 혹은 타인에 대한 존중과 배려 부족에서 그 원인을 찾아서는 곤란하다. 개별 자연인 간의 신뢰는 인간 됨됨이와 태도에서 비롯되지만, 사회적 관계 속에서 만나는 개인과 집단 간의 신뢰는 제도에서 비롯된다. 우리가 직면한 신뢰의 위기는 후자이다. 국가가 제도를 통해 나의 안위를 지켜주지 못하고, 반칙과 탈법이 번번이 승리하도록 방치한다면, 국민은 억척스럽게 각자도생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신뢰가 끼어들 틈이 없다.

우리 사회의 신뢰를 형성하는 일차적 책임은 정부에 있다. 공정하고 정의로운 제도를 만들고, 이것을 투명하고 엄정하게 집행하면, 우리 사회의 신뢰는 차곡차곡 쌓인다. 그러나 출범부터 지금껏 박근혜 정부는 국민의 신뢰를 깨는 갈지자 행보를 걷고 있다. 신뢰의 힘은 강하다. 그런 만큼 신뢰 붕괴의 폐해도 크다. 정부가 결자해지해야 한다. 남은 임기 동안 신뢰 붕괴의 주역이 아니라, 신뢰 형성의 주체 역할을 해야 한다.


이진석 | 서울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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