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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에서 자식을 키우는 50대 여성이 최저임금 인상으로 일자리를 잃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정부의 소득주도 경제성장이 잘 안 되고 있음을 인정하라.”

김성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국회 운영위원회에 출석한 임종석 대통령비서실장에게 던진 발언이었다. 텔레비전 토론 프로그램에서도 다시 한번 이 사건을 언급했다. 같은 당의 김용태 사무총장도 자신의 페이스북에 “참으로 안타까운 사연”이라며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이라는 괴물이 노동취약계층의 국민들을 죽이고 있는데도, 청와대는 눈 하나 깜짝 않는다”라고 한탄했다.

반전이 일어났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이 사연의 주인공이 가공의 인물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김성태 원내대표 발언의 근거는 8월24일자 한국경제신문 기사였는데, 오마이뉴스가 대전의 검·경찰에 확인해본 결과 그런 사건을 찾을 수 없었다고 보도하면서 ‘가짜 뉴스 논란’이 벌어진 것이다. 한국경제는 29일, 다시 후속 보도를 실었다. 고인의 나이와 상황에 착오가 있기는 했으나 ‘가짜 뉴스’는 아니었다는 해명이었다. 다소 옹색한 변명이었다. 원 기사는 제목과 첫 문장에서부터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을 강조하며 마치 이로 인해 한 50대 여성이 극단적 선택을 한 것처럼 작성되었는데, 후속 보도에서는 한 30대 여성의 어려운 경제사정과 불행한 결말을 상술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주변에선 최저임금 인상 등으로 일자리가 줄어든 탓이라고 입을 모았다”라는 모호한 간접 취재 문장을 보태기는 했지만, 고인이 일을 못 찾아 고생한 것은 올해 초부터였다고 했다. ‘최저임금 인상’과는 시기적으로나 논리적으로 큰 연관이 없었다.

김성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31일 국회에서 열린 소득주도성장정책폐기 촉구를 위한 긴급 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권호욱 선임기자

하지만 한국경제의 항변도 일리가 있다. 원 기사가 ‘가짜 뉴스’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냥 불성실한 오보였을 뿐이다. 물론 ‘악의적·의도적 오보’인지 여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자연스레 의문이 생긴다. 가짜 뉴스와 오보는 무슨 차이인가? 왜 한국경제는 “사실관계에 오류가 발견되어 정정합니다” 정도의 정정보도 대신 기사를 삭제하면서도 “가짜 뉴스 논란은 유감”이라며 성을 냈을까?

가짜 뉴스(fake news)는 원래 특정 의도를 가지고 사실이나 사진·영상을 조작하여 만든, 기사는 아니지만 기사 형식을 갖춘 텍스트를 지칭한다. 비방이나 풍자가 목적일 때도 있고 단순히 이윤 창출을 위한 기만행위일 때도 있다. 권위 있는 언론사가 가짜 뉴스를 생산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잘못된 사실관계가 포함된 기사, 낚시성 기사, 유언비어, 편향된 의견 기사 등을 묶어 몽땅 가짜 뉴스라 부르곤 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뉴욕 타임스를 가짜 뉴스라 부르는 경우도 여기에 포함되는 것을 보면 이 용어의 오용이 반드시 영어 해석의 문제만은 아닌 듯하다. 느슨한 용어 사용의 이유는 간단하다. 어떤 기사나 언론매체를 ‘가짜 뉴스’라 부르는 순간 그 매체의 신뢰도가 급락하기 때문이다. 실증적으로 검증된 효과이다. 그러니 소득주도 경제성장 모델을 지지하는 이들은 한국경제의 보도를 가짜 뉴스라 정의하려 들고, 한국경제는 (오보일지언정) 가짜 뉴스는 아니라고 소리를 높이는 것이다.

담론 현장에서 ‘가짜 뉴스’는 ‘(질적으로) 나쁜 뉴스’의 수사적 표현이 되어버렸다. 굳이 구별하려 하지 않거나, 어쩌면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혼용한다. 문제는, 덜 나쁜 뉴스와 아주 나쁜 뉴스, 뉴스를 가장한 기만, 심지어 그냥 마음에 안 드는 뉴스들을 모두 ‘가짜 뉴스’라는 모호한 개념으로 퉁치다 보니 언론 전반의 신뢰도는 급격하게 하락하고 ‘좋은(잘 만든) 뉴스’에 대한 판단 기준도 흔들린다는 점이다. ‘나쁜 뉴스’가 지난 몇년 새 갑자기 생긴 것 같은 착시감마저 주게 된다. 나쁜 뉴스를 가짜 뉴스라 부르는 바람에 언론의 진짜 위기는 가려진다.

‘기레기’라는 단어도 ‘가짜 뉴스’만큼이나 모호하고 공격적인 단어다. 기자와 쓰레기의 합성어인 이 단어는 애초에 돈이나 권력을 위하여 의도적으로 자신의 직무와 능력을 악용하는, 혹은 언론인으로서의 전문성이나 사명감은 없이 특권만 누리려는 기자들을 지칭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그냥 ‘내 마음에 들지 않는’ 기자들을 총칭하는 단어가 되었다. 현장 취재도 안 하고 부정확한 기사를 싣는 기자의 안이함을 차분하고 꼼꼼하게 비판하는 대신 ‘기레기’ 한 마디로 끝내버리면 속은 시원할지 모르지만 오히려 기자의 진짜 문제는 가려진다. 모두가 기레기가 되면 나쁜 기자는 남지 않는다.

새로운 매체 환경에서 등장한 가짜 뉴스를 찾아내 걸러내는 일은 당연히 중요하다. 하지만 질 낮은 기사를 비판하고 좋은 뉴스를 격려하는 일은 더 중요하다. 가짜 뉴스가 아니라고 다 진짜 뉴스는 아니다.

<윤태진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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