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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아시안게임이 막을 내린 그날은 유난히 하늘이 맑았다. 그 맑은 하늘을 날아온 하얀색 북한 비행기가 인천공항에 내렸다. 북한 고위급 3인방 황병서, 최룡해, 김양건은 명목상 아시안게임 폐회식 참관을 위해 인천을 방문했지만, 국민은 경색된 남북관계가 전환되는 계기가 되길 기대하였다. 남과 북은 고위급 회담을 열기로 합의하였다. 참 잘된 일이다. 이날이 2014년 10월4일이다.

7년 전 2007년 10월4일, 평양 백화원 초대소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은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 이른바 10·4 남북정상선언에 서명하였다. 이 선언은 6·15 공동선언을 계승하고, 남북관계를 상호 존중 및 신뢰관계로 전환시키기로 합의하였다. 또한 한반도에서 긴장완화와 평화를 보장하고 종전을 선언하기 위해 주변국과 협력하는 문제와 한반도 경제협력 사업을 공리공영과 유무상통의 원칙에서 발전시키기로 하였다. 그리고 사회·문화 분야의 교류와 협력, 인도주의 협력 사업을 추진하기로 하였다.

물론 이 선언은 이명박 정부와 현 정부에서 뒷방 신세가 되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자세히 보면 10·4 선언에는 통일이라는 말이 없다. 왜 그럴까? 왜 이 선언에는 남북한이 공통으로 지향하는 통일이 없고 협력과 신뢰 그리고 교류만이 있는 것일까?

이는 통일보다 평화가 한반도의 시급한 사안이기 때문이다. 평화가 전제되지 않은 통일, 남북 간 적대적 대치와 불신이 상호 존중과 신뢰로 전이되지 않은 상태에서 얼마나 통일이 초현실적인지 그 당시의 지도자들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통일이 한반도의 영구적 평화를 위한 지향점이어야 하며, 통일이 한반도의 평화를 해쳐서도 안된다는 문제의식이 표현된 것이었다. 또한 현실적으로 한반도를 무겁게 누르고 있는 긴장 구도는 통일보다 평화가 더 중요한 가치여야 한다는 것이다. 한반도가 평화로워야 통일이 되고, 통일이 평화 그 자체여야 한다는 것이 바로 10·4 선언의 꿈이다.

지난 7년, 우리는 북한과의 협력은 고사하고 북핵을 해결하지 못했다. 6자회담은 사실상 무력화되어 무용론까지 등장한다. 금강산관광은 중단되었고, 개성공단은 성장하지 못했다. 군사적으로 도발하는 북한에 직접 ‘왜 그러느냐’고 직접 물어보지도 못하니 남북한 간의 소통은 소멸됐다.

오히려 북한과 대화해야 한다는 주장은 불량한 북한에 나약하게 보이는 것이라는 주장이 더 설득력 있게 되었다. 북한 경제가 중국에 종속되는 것이 불안하지만 남북한 경제교류는 김정은 정권을 살찌우는 것이라고 반대한다.

만약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북핵을 과소평가하고 안일한 대응으로 시간을 낭비했다는 주장이 옳다고 치자. 그러면 지난 7년간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한반도의 불안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신뢰를 바탕으로 공존하지 못하는 분단 상황에서 우리가 준비하는 통일이 한반도 평화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북한이 군사적으로 위험한 존재라면, 북한을 우리 경제에 의존하게 만드는 것이 왜 북한을 이롭게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양측의 인적교류가 서로 멀어지는 문화와 정서의 간극을 좁혀 상호적대감을 소멸시킬 수 있다면, 한반도의 안보 환경이 극단의 군사적 긴장보다 안정적인 평화를 잉태할 것인데 말이다.

4일 인천아시아드주경기장에서 열린 2014 인천 아시안게임 폐막식에서 정홍원 국무총리 등 우리측 인사들이 한국선수단이 입장하자 일어나 박수치는 반면, 황병서 북한군 총정치국장, 최룡해 노동당 비서는 굳은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 있다. (출처 : 경향DB)


현 정부가 추진하는 통일대박론은 더욱 섬세해져야 한다. 연애도 못하는데 결혼이 대박이라는 주장은 초현실적이다. 결혼하고 싶은 상대가 있는데 그 상대와 대화도 하지 않으면서 여기저기에 결혼이 대박이라고 외치고 다닌다면 이는 정상이 아니다. 그렇게 통일이 중요하다면 그 방법론과 지향점을 명확히 담은 10·4 선언의 정신을 남과 북이 존중해야 할 것이다.

10월4일 우리는 한반도의 평화가 어느 한 측의 노력으로만 만드는 것이 아님을 인천에서 직접 목격하였다. 그 이유가 어찌되었든 북한이 고도의 한수를 두었다. 우리가 그만큼의 한수를 두어야 한다. 평화의 길은 길고도 험하다. 그러나 그 방법론은 이미 10·4 선언에 자세히 명기되어 있다. 통일은 평화가 안내하는 아주 멀리 있는 종착역이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보다 평화가 우선이어야 한다.


최종건 | 연세대 교수·국제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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